2004/05/22 06:43


지난 9월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제 4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안이 2004년 1월 1일부터 시행됨에 따라 일본의 영화, 음반, 게임 등이 전면 개방된다. 새해 첫날 서울에서 열린 일본대중문화 개방을 축하하는 일본 락밴드 튜브의 공연을 시작으로 일본 뮤지션들의 앨범 발매가 잇따르고, 콘서트도 줄이을 예정이다. 이에 대한 문화계의 시각은 다양하지만 국내 대중문화의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기대가 크다.
음반시장 세계 제2위인 일본. 이 일본의 음악 씬에 ’80년대 후반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부야계 음악을 이번 달 뮤크테마로 선정했다. 비록 일본음악의 전면적인 개방이 이루어진 건 올해 1월 1일부터지만, 이미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음악팬들에게 시부야계 음악은 익히 알려져 왔고, 매니아층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어떤 이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겐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시부야계 사운드! 시부야계의 정체는 무엇이고 시부야 사운드를 들려주는 뮤지션들은 누가있을까.

시부야계(Shibuya-Kei)란?

지난 ’98년을 정리하는 스핀(Spin)지의 기획기사 중 ‘International Pop’부문에서는 프랑스의 일렉트로니카와 함께 시부야에서 일어난 새로운 경향, 시부야계의 약진을 주요하게 다루었다. 시부야는 일본의 수도 동경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쇼핑과 클럽문화가 발달된 젊은이들의 거리이다. ‘시부야’라는 지명으로 인해 시부야계 음악이라 하면, 보통 그 지역 출신의 뮤지션들이 만든 음악이겠거니 짐작할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부야를 중심으로 활동하거나 그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소비되는 음악들을 시부야계라 한다. 즉 문화, 패션의 거리 시부야에서 인정받고 사랑받는 음악들인 것이다. 서양에서는 시부야케이(Shibuya-kei, 케이는 ‘계’의 일본식 발음)로 불려지고 있다.

라틴, 디스코, 어반, 재즈, 프렌치팝, 스웨디쉬팝, 인디팝, 챔버팝, 하우스, 일렉트로니카, 버블검, 힙합 등 시부야계에는 온갖 복고 사운드에 대한 탐색과 함께 실험주의적인 성향 또한 다분하다. 이런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시부야계 음악에 대해 오리지널리티의 결핍이라고 비난하는 이도 있지만, 시부야계에서 우리가 매혹될만한 진취적인 사운드를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다. 이들의 음악은 일본 뿐 아니라 해외 인디레이블과 인디클럽들을 주무대로 활동하며 영미 음반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플리퍼스 기타(Flipper’s Guitar)를 필두로 한 시부야계 뮤지션들

3년이란 활동기간, 3장의 정규앨범이란 결과물을 놓고 보면 다소 미흡해 보이지만 J-Rock, Punk가 즐비한 일본 음악계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매니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등장한 시부야계의 출발점이자, 이후 등장할 시부야계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밴드이다. 원래 5인조로 결성됐으나 1집 이후 오자와 켄지(Ozawa Kenji), 오야마다 케이고(Oyamada Keigo)의 듀오로 재편된 플리퍼스 기타(Flipper’s Guitar)는 상업성, 음악성 모두 인정받았지만 음악적 견해차로 해체된다.


이후 오야마다 케이고는 시부야계의 상징적 레이블 트라토리아(Trattoria)를 설립하고 코넬리우스(Cornelius, 영화‘혹성탈출’의 Dr. Cornelius에서 따온 이름)라는 이름의 원맨밴드로 활동을 시작한다. 서양에서 ‘제2의 Beck’으로 평가받는 오야마다 케이고. 그의 앨범엔 문화적 잡식성 취향이 고스란히 담겨있는데 디즈니에서 블랙사바스까지 다양하게 공존하는 그의 사운드는 위트가 넘치고 전위적인 작품들로 문화적인 충격을 안겨준다. 또다른 멤버 오자와 켄지는 음악성과 대중성을 갖춘 앨범들을 발표해 호평을 받았고, 이후 노나 리브스(Nona Reeves), 키린지(Kirinji) 등 네오 시부야계 뮤지션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시부야계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뮤지션, 피치카토 화이브(Pizzicato Five). 올뮤직가이드에선 그들을 ‘시부야계의 대부’로 지칭하고 있다. “우리의 음악은 복고 패션 리바이벌, YMO, 플라스틱스(Plastics), 부치 콜린스(Bootsy Collins), 몽키스(Monkees), 앤디 워홀(Andy Warhol), 세르지오 맨데스(Sergio Mendes), 버트 바카라(Burt Bacharach)등에서 고루 영향받았다”라는 그들의 얘기처럼 어느 한가지로 규정지을 수 없는 피치카토 화이브의 음악은 음원 재구성(Cut & Paste)기법을 바탕으로 한 그들 특유의 시부야계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단순히 음악만 하는 것 이 아니라 예술개념을 도입하여 유행을 선도했던 그들에게는 ‘Fashion People’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음악적 특징으로 뮤지션들을 살펴보면 먼저 일렉트로니카 계열에서 눈에 띄는 재일교포 3세 토와테이(Towa Tei). 그의 음반엔 카일리 미노그, 비즈 마키 등 다양한 여성 게스트 보컬이 등장하여 그만큼 개성있고 독특한 음색을 창출해낸다. 그밖에 Minekawa Takako, Hi-Posi 등이 있으며, 힙합성향의 Scha Dara Parr, Tokyo No.1 Soul Set, Kaseki Cider, 애시드 재즈 성향의 Kyoto Jazz Massive, Theatre Brook, 프렌치팝 계열의 Kahimi Karie, Paris Match, Instant Cytron, 모던록 성향의 Oh! Penelope, Nakazima Ayumi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하우스를 바탕으로 깊이있는 클럽사운드를 들려주는 Towa tei, Fantastic Plastic Machine, Mondo grosso 등은 우리나라에서도 사랑받고 있으며 이미 내한하여 공연을 가진 바 있다.

그외에 해외파 뮤지션들중엔 쇼넨 나이프(Shonen knife), 뉴욕에서 밴드를 결성한 치보마토(Cibo matto)등이 있으며, 스코틀랜드인이지만 일본 출신 뮤지션들과 왕성한 교류를 가지며 음악적으로 시부야계로 분류되는 닉 커리의 일인 프로젝트 모머스(Momus)가 있다. 또한 시부야계 음악들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Sushi3003, Sushi4004는 수많은 시부야계 뮤지션들의 성공적인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시부야계의 뮤지션 각각에 대해 더 자세히 열거하자면 마우스 스크롤하다가 지칠것 같아(^^) 그외의 뮤지션들은 설명보다는 아래에 선곡한 주옥 같은 음악들로 대신한다.

시부야라는 동경의 작은 동네에서 시작됐지만,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들려주는 사운드만큼이나 다양한 요소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시부야계 뮤지션들의 긴밀한 유대관계에 의한 발전, 초기 록큰롤부터 보사노바에 이르기까지 온갖 음악적 소재에의 다양한 실험성 등이 있을 것이다. 규격화 된 일본 메인스트림에 반기를 들고 인디신에 등장해 인디음악의 활성화에 기여하고, 음악적으로 당당히 ‘시부야계’라는 독립적인 이름으로 분류되지만 음악적인 장르로 규정짓기보다 영화, 패션 등 토털 아트 개념을 도입하여 트렌드를 주도하고 문화적인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있는 시부야계. 적당한 음악 재료들을 뒤섞어 표면적으로 달콤하고 세련되고 포장해 놓았다는 비난도 있지만, 결코 수동적인 서방문화의 답습이 아닌,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그들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 시부야계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지금껏 그래왔듯 뮤지션들의 성향에 따라 그들만의 새로운 사운드를 구축해가지 않을까.

지금까지 이야기를 풀어낸 시부야계 음악들을 초기 시부야 사운드에서부터 네오 시부야케이(Neo Shibuya-Kei)까지 사정이 허락하는대로 선곡하였고, 다소 이질적일 순 있으나 한국적 슈게이징을 보여주는 ‘전자양’의 데뷔앨범을 덧붙였다. 전 트랙이 홈레코딩 방식으로 제작된 이 앨범은 앨범자켓부터 음악까지 코넬리우스의 [Fantasma]의 나른하고도 우울한 감수성을 느낄 수 있는 앨범이다. 그밖에도 시부야계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국내 뮤지션들로는 디제이 소울스케이프(Dj SoulScape), 롤러코스터 등을 꼽고 있다. 해외 뮤지션들과의 교류가 잦은 시부야계가 우리나라 뮤지션들과의 교감도 잦아져서 우리나라 음악의 역수출에도 기여했으면 하는 바이다.

자, 이제부터 시부야 사운드 속으로 빠져들 시간!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기분좋은 일 가득하시길 바라며…



2004. 1. 2. 글 오세윤 a.k.a. 슈북슈북 가오리▶ 。˚。˚ ° ³ (luvbuzz@mukebox.com)

  

참고자료 - 이종현의 ‘대중음악 따져읽기:Shibuya-Kei’/ 딴지일보 '시부야가 머길래' (글 카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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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himi karie - (we’ll go) separate ways

                                               

                                                  instant cytron - petit no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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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야케이 이미지는 네이버 이미지 검색을,,, 으흐흐

디자이너의 손길을 한번 거치니 깔끔하니 마음에 드는군.

고뇌했지만 작업이 잘 안되는 바람에 막판에 내용정리하고 음악을 선곡했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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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L from Ipanema

mukebox, 2004 2009. 7. 12. 01:47
2004/05/22 06:03 

1960년대 프랑스에선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프랑소와 트뤼포(François Truffaut) 등의 젊은 영화인들에 의해 누벨바그(Nouvelle Vague)라는 새로운 경향의 영화 운동이 주창되었고, 전세계적으로 록의 혁명이 일어나는 등, 2차 대전을 전후로 태어난 문화 세대들은 기존의 관념을 깨는 새로운 문화코드를 필요로 했다.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볼 때 1960년대 초 보사노바(BossaNova)의 등장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보사노바는 ‘새로운 경향’을 뜻하는 단어로(Bossa:돌기, 소질, 경향/ Nova:새로운), 브라질의 민속음악인 삼바에 그 근원을 두고 미국의 쿨재즈를 가미시킨 것으로 재즈보사, 재즈삼바라 불리기도 한다. 보사노바는 재즈가 아닌 모던 재즈의 영향을 살짝 받은 브라질의, 브라질인에 의한 ‘월드뮤직’이다.

보사노바를 알기 위해서는 브라질의 전통적인 대중음악이라는 배경을 이해하여야 한다. 전통적으로 브라질의 노동자ㆍ빈민계층은 타악기 반주가 특색있는 삼바를 즐겼다. 당시의 상류층들은 삼바에 매력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신분적인 격차로 인해 그것을 그대로 즐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신들이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바로 보사노바였다. 다시 말해서 브라질 원주민(흑인)들에게 어울린 음악이 삼바였다면 보사노바는 식민통치를 의해 대서양을 건너온 스페인 계열의 후손들이 즐긴 음악이었다.

삼바 리듬과 재즈적 요소가 가미된 보사노바는 쇼팽과 드뷔시의 감성과 콜 포터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세련된 감각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미국인들의 정서에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흡수될 수 있었다.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번진 보사노바의 대 유행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우리 나라의 대중음악에서도 보사노바의 흔적이 발견되는 등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보사노바는 삼바의 리듬을 약식화하여 강한 비트의 자극을 없애고 전체적으로 속도감을 떨어뜨렸으며 드럼을 기준으로 삼았다. 음계는 감미롭고 서정적이고 대중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었다. 보사노바의 주류는 친밀하고 절제된 매너로 공연하는 보컬곡이었다. 귓가에 대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불려질 때 더욱 감성적이고 달콤 쌉사름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다.

최초의 보사노바 앨범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의 곡을 노래한 주앙 질베르토(Joao Gilberto)의 56년작 “Chega De Saudade”가 그 시초로 알려져 있다. 또한 질베르토의 ‘59년 “Orfeu Negro”(흑인올페) O.S.T.는 루이즈 봉파(Luis Bonfa)의 “Manha de Carnaval”라는 곡을 비롯해 당대 브라질 최고의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하여 수준 높은 곡들을 담아냈는데 이 O.S.T.는 보사노바의 본격적인 등장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과 주앙 질베르토에 의해 브라질의 국민 음악으로 부상했던 보사노바는 브라질에서 이 신선한 아이디어를 접한 기타리스트 찰리 버드(Charlie Byrd)와 테너 색소포니스트 스탄 게츠(Stan Getz)가 버브(Verve)에서 [Jazz Samba]를 레코딩함에 따라 60년대 재즈 씬에 불어닥칠 보사노바 광풍(Bossa Nova Craze)의 전조를 마련한다.

94년 67세의 일기를 끝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빔의 영향력은 재즈의 많은 아티스트의 음악 속으로 깊숙이 반영되었고, 마이클 프랭스(Michael Franks)는 그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담은 'Antonio's Song'에서도 내비쳤다. 그밖에 최초의 보사노바 뮤지션이었던 주앙 질베르토와 천상의 목소리를 가졌던 그의 아내 아스트루드 질베르토(Astrud Gilberto), 루이즈 본파, 찰리 버드, 로린도 알메이다(Laurindo Almeida) 등은 버브의 후원 속에 보사노바를 전 세계의 음악으로 확산시킨 보사노바의 전파자들이었다.

70년대 후반부터 주춤했던 보사노바의 열기는 90년대 중반 다시 버브에 의해 새롭게 점화된다. 최근 보사노바가 재즈의 중심으로 밀려들고 있음에 강한 확신을 주는 앨범은 리 릿나워(Lee Ritenour)가 자신의 Independent Label 2의 출범을 알리며 공개한 'Twist Of Jobim'이다.
보사노바를 퓨전풍으로 살짝 뒤틀어서 해석한 이 앨범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앨범으로 신 보사노바풍을 주도하고 있다.

보사노바 곡을 선곡하면서 우리에게 낯익은 아티스트들의 주옥 같은 명반, 명곡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인식하진 않았어도 보사노바의 리듬과 분위기를 나름대로 잘 살린 곡들을 함께 다루어보았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을 잘 살펴보면 보사노바로 알려진 건 별로 안되지만 보사노바 리듬을 사용한 곡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국적인 정취의 음악으로 느껴지던 보사노바는 우리에게도 가깝게 사랑 받고 있었던 것이다.

재즈바 같은 곳에 가면 보편적으로 많이 틀어주고, 뻔한 레퍼토리의 편집 음반도 적지않게 쏟아져 나오지만 식상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듣기 좋고 편안하면서도 높은 완성도를 갖춘 보사노바의 매력 때문일 것이다.

찬란한 햇살 아래 우리들의 열정을 더욱 증폭시켜 주다가도, 낮동안의 무더위가 잠시 주춤하는 한여름 밤, 귓가를 간지럽히며 푸른 바다 같은 청량감을 안겨주는 보사노바.

여름의 끝자락, 막바지 더위속에 젖어드는 이른 가을의 향기속에서 세련되고 매혹적인 보사노바의 흥취를 만끽해 보는건 어떨까.


'Sweet dreams till sunbeam finds you…'
태양이 당신을 찾을 때까지 보사노바와 함께 달콤한 꿈을….

 

2003. 8.20. 글 오세윤 a.k.a.슈북슈북가오리 (luvbuzz@mukebox.com) <- 지금은 사라진 메일..

stan getz ,, girl from Ipan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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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사노바 관련된 이미지 찾기가 너무 힘들었다

뒤지고 뒤져서 나온 비키니입은 저여자

내가 생각한 girl from Ipanema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마음에 들어서 ^-^ 

garota de Ipanema. 좋아좋아.

'Sweet dreams till sunbeam finds you…' 이건 오징어언니가 깃들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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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손홍주 (사진부 팀장) | 2007.05.08

정윤철: 당신이 자주 인용하는 발터 벤야민의 말이 생각난다. 정치적인 것을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은 파시즘이고 미학적인 것을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은 자본주의라고.
정성일: 그 문장을 김우창 번역으로 스무살에 읽었다. 이후 모든 판단에서 하나의 좌표가 되었던 말 중의 하나다.

 

정윤철: 영화 자체의 미학과 영화가 갖는 정치성은 늘 대립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가.
정성일: 아니, 그 반대다.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것을 누군가는 미학적으로 이해하고 누군가는 정치적으로 이해하는 거다. 나는 그것을 전적으로 미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타락하고, 정치적으로만 본다면 프로파간다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예술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다루고 있다. 창조를 다룰 때는 미학과 정치, 혹은 삶과 사회, 혹은 과거와 미래 말하자면 지나간 시간과 도래해야하는 시간, 그 둘 사이의 중재의 문제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임무 중의 하나는 창조적 중재에 있지 않을까. 오직 예술가들만이 창조적 중재에 나선다. 정치가들은 협상을 하고, 장사꾼들은 판매할 뿐이다. 누구도 중재는 하려 들지 않는데, 그것을 해결할 임무가 예술가들에게 주어져있다. 그리고 그 중재의 기술을 읽어내는 것이 비평가의 몫이다.

 

정윤철: 하지만 질문을 던지지 못하는 영화에 관해서는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나쁜 영화라고 하더라도 쓴 소리를 해야만 발전이 되는 것이 아닐까..
정성일: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어서 영화에 관해 쓸 때는 두 가지 중의 하나다. 그 영화에 대해 ‘친화성’을 느끼거나 ‘적개심’을 느끼는 것. 내게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영화에 관해서 쓰는 것은 나를 무료하게 만들고, 뭐랄까 내가 망가지는 느낌이다. 나 말고도 비평가는 많으니까 다른 사람이 써도 충분하지 않겠나.

 

정윤철: 그렇다면 진짜 대중영화는 어떤가. 감독으로서 나는 평론이 계속 세상에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는데, 감흥이 없더라도 잘 만든 대중적인 영화에 대해 글을 쓸 수는 없는 건가.
정성일: 나는 당신이 말하는 대중적인 영화도 좋아한다. 나는 지금도 홍콩무협영화를 좋아하고, 두기봉의 <흑사회>를 보면서 심금을 울린다고 생각한다. 나는 두기봉의 영화가 왜 아직도 한국에서 개봉이 안되는지 너무 궁금한 사람이다. 혹은 전적으로, 정말 전적으로 김태희의 클로즈업이 보고 싶어서 <중천>을 보러 간다. 아니면 대중들의 관심이 궁금해서 <미녀는 괴로워>를 보기도 한다. 내가 완전히 고립돼서 내 취향만 고집하는건 아니다. 나도 2007년 남한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고 관심사를 공유하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몸이 내 마음이 더 좋아하는 영화들에 끌리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어떤 평론가에게도 하루는 24시간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봐야 하는 영화와 내가 보고 싶어하지 않는 영화의 시사회가 겹친다면, 당연히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한다. 하지만 <스윙걸즈> <박치기!> <훌라걸즈>같은 영화들을 보고 아 죽여주게 나를 울리는구나, 이런 느낌을 받기는 한다.

 

정윤철: 느낌을 받기는 해도 그런 영화들은 다른 사람이 쓸 것이라는 건가.
정성일: 내가 보고 싶어서 보기는 하지만, 허우샤오시엔의 <쓰리 타임즈>와 에릭 쿠의 <내곁에 있어줘>같은 영화들만큼 울림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감흥을 받아야 쓰고 싶은 말이 많아지지 별 느낌이 없는데 쓰고 싶지는 않다. 나는 같은 주에 <훌라걸즈>와 <좋지 아니한가>를 봤다. <씨네21>에 연재하는 <전영객잔>을 써야했는데, 나는 두 영화 중에서 <좋지 아니한가>를 택했다. 쓸 것이 많고 궁금한 게 많고 질문할 지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칭찬은 안했지. 하지만 정성일의 관심권 안에 들었다는 생각에 묘하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어. 옛날 이장호 감독이 신상옥 감독 조감독을 할 때 5년 동안 감독에게 늘 이름 대신 야이 새끼야, 자식아 불려지다가 어느 날 녹음실에서 신상옥 감독이 ‘장호야~’ 하는 순간 선 채로 눈물을 주루륵 흘렸더랬는데 그런 건가...

 

정윤철: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평론가가 되어 인터넷에 평론을 쓰고, 별점이나 인터넷 평점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리고 있다. 이런 세태를 본다면 기존 영화평론이 관객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필요가 절실해지지 않았는가. 대중영화라고 할지라도 그 최소한의 미덕을 발굴해주고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려는 평론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정성일: 나는 반문하고 싶다. 읽는 행위 자체를 싫어하는데 어떤 시도를 한들 읽겠느냐는 거다. 지금 인터넷 글쓰기가 대세가 되어가고 있지만, 글이 약간만 길면 ‘스크롤의 압박’이라는 말로 제껴 버린다. 이런 현실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영화를 위해 영화비평이 대중에게 굴복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비평마저 대중에게 굴복한다면 그 다음엔 더 이상 방어선이 없다. 그 다음엔 남는 건 하나, 영화는 돈에 굴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비평은 한편으로 영화를 위한 일종의 방어선 같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다. 허우샤오시엔을 임권택을 데이빗 린치를 진지하게 사고하고 질문하는 방어선이 사라졌을 때, 그때는 방어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남아있지 않다. 시장에서 어떤 생산적인 담론도 만들지 못하고 버림받는다면 때는 영화가 굴복을 해야지. 나는 그때는 굉장히 끔찍해질 것 같다.

 

정윤철: 모든 감독의 꿈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같이 잡는 것이 아닐까.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정성일: 그 시대는 끝난 게 아닐까. 영화는 태어난지 이미 100년이 넘었다.

 

정윤철: 질문을 마저 하자면 결국 비평도 대중성과 심도있는 분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 불가능한가. 그런 시대도 이미 끝난 건가?
정성일: 나는 영화에서의 대중성이라는 문제를 다른 판본으로 말하자면 상품성이라고 생각한다. 둘은 같은 말의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영화가 대중성을 껴안는 한편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서 나아가던 시대는 영화의 고전주의시대였다(3,40년대). 예를 들면 우리는 고전주의 회화를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를 통과하며 그림에서 형상이 부서졌고, 그림은 보는 이에게 교양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소통을 하고 싶다고 고전주의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퇴행이다. 영화는 계속 앞으로 가고 있는 거다. 그 100년이라는 역사를 왜 무효화시키려고 하는가. 영화도 관객에게 교양과 역사에 대한 이해와 시네마테크적인 경험과 영화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관객은 게으르게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즉각적으로 자기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영화를 원시적인 상태로 돌려보내는 거다. 영화는 고전주의 시대를 통과했고, 이제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의 길을 가고 있다. 그것을 왜 퇴행적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심지어 감독들이 왜 자꾸 고개를 뒤로 돌려 그런 퇴행을 바라보는가. 나는 거기에 대해서 분개하는 쪽이다.

 

정윤철: 영화는 꿈이지만 관객은 꿈꾸어서는 안 된다는 고다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가.
정성일: 그렇다. 고다르의 영화를 보면서 중3때 깨달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난 꿈꿀 수 없다.

 

정윤철: 중3때!!! 본의 아니게 고다르의 영화를 보면서 선악과를 깨문 격이다. 그러니까 신이 내린 거겠다.
정성일: 그분이 오신 거지(웃음) 나중에 다시 보니 프랑스 문화원에서 본 <기관총 부대>는 고다르 영화 중 에서도 그렇게 쇼킹한 영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전까지 주말의 명화와 홍콩액션영화만 보면서 관습적인 영화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이야기에만 심취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며 문득 이게 영화를 보는 방법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었다.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인데, 영화에서 카메라를 발견하는 순간, 너는 영화를 볼 때면 언제나 카메라가 먼저 보이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사실 보통 관객에게는 카메라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행복한 거다. 이야기에 몰두할 수 있고 인물에 몰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영화를 보는 건 고전적인 거고 나아가 원시적인 거다.

 

그러나 인간은 때때로 퇴행을 즐긴다. 어린애였던 시절, 짐승이었던 때를 그리워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도 퇴행 아닌가. 순간적으로 어린 애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중3 이후로 영화의 신이 내려 카메라 귀신이 보이는 이 박수무당에게 그 자신이 쓴 몇몇 평론에 대한 의문점을 물어보았고, 그는 진지하고 긴 답변을 한다.

 

정윤철: 당신은 무엇이 현대적인 영화라고 생각하는가. 한국이든 다른 나라 영화든.
정성일: 그것은 아마도 현대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거다. 현대가 컨템포러리가 될 수도 있고 모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현대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놓을 것인가하는 문제가 있다. 영화에서 현대라는 문제를 다루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까닭은 영화가 이미 근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근대의 맨 끝자락에 도착했다. 회화에 모던이 도착했던 인상주의 시대에, 혹은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즈>를 쓰고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던 시대에, 영화가 시작됐다. 그 두 작품은 플래시백을 비롯해 영화적인 기법을 사용했는데, 영화는 처음부터 그런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한다. 영화에서 모던이 끝날 때 영화 자체의 운명도 끝나는 것이고, 영화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던이라고. 거기엔 어떤 동시성이 있다. 나는 그런 점에서 만일 영화가 박물관으로 간다면 모던한 것에 종말이 왔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다음에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변할지 우리는 예단할 수 없다. 오늘날 미술은 인스톨레이션의 개념이 되었고 더 이상 과거의 프레스코화 개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캔버스로 작업하는 미술은 과거의 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예술도 수많은 변화에 조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현재 보고 있는 영화의 방식이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우리가 모던한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영화에 두 번째 혁명의 시기가 시작됐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뤼미에르 이후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이행의 시기가 도래했고 그 핵심은 디지털이다. 그것이 어떻게 혁신될지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지금은 누구나 영화감독이다.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나와 영화를 찍는데, 지금은 핸드폰만 켜면 영화감독 아닌가. 프레임과 지속시간과 주연을 결정하고 블로그에 띄어 상영을 한다. 너무나 편한 매체이기 때문에, 예전에 종이와 펜만 있으면 이야기를 썼듯, 카메라는 더 이상 특권이 아니다. 오늘날 영화는 점점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미장센단편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만든 감독이 큰 상을 받은 다음 충무로로 오고 있다. 한 감독이 처음으로 만든 3시간짜리 영화가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다. 올해부터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한편에 15억원씩 지원하는 프로젝트가 생기는데, 그걸 연출하는 감독은 훈련된 연출자가 아닐 수도 있다. 들뢰즈가 생전에 <리베라시옹>과 인터뷰를 했을 때 세번째 책 <디지털 이미지>를 쓰게 될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그 책을 쓰지 못했지만, 우리는 목격은 하고 있다. 혹은 그 시대로 들어왔다. 다만 우리는 디지털 이미지 시대에 걸맞는 미학이나 철학을 갖고 있지 못하다.

 

정윤철: 현대적인 영화가 모던 자체라고 해도 일반 관객으로서는 내가 보는 영화가 쌍팔년도 영화인지 재탕영화인지 현대적인 영화인지 알아야할 것같다.
정성일: 반대로 질문하겠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정윤철: 나는 영화가 100년밖에 되지 않은 예술이므로 다른 예술과 비교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미술과 비교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처음 인상파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왜 이따위 그림을 그렸느냐고 욕을 했다. 그런데 인상파가 자리를 잡게된 이유는 그전 그림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데 비해, 그러니까 예수의 승천이나 왕의 대관식이나 그리스 신화 등을 그렸던데 비해, 인상파는 그릴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던 것들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해바라기나 해지는 인상이나 나무들을. 인상파 회화들은 캐릭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에너지와 아름다움을 느낌과 인상으로 받았고 감정을 그리기 시작한 거다. 나는 거기서 모던 회화가 시작됐고, 세잔이 나오고 입체파로 넘어오고, 미술이 인간의 내면으로까지 들어갔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으려고 시작됐던 영화는 그 다음부터는 뭘 그릴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이야기는 약하더라도 캐릭터와 사람을 다룰 때, 그것이 모던한 영화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위 말하는 플롯 위주의 영화가 아닌 캐릭터 위주의 영화, 더 나아가 인간의 내면으로까지 뛰어드는 영화가 모던한 영화라는 생각이다. 인간의 내면으로 뛰어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의 내면에는 시공간의 개념이 없고, 기억이라는 것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지 않은가. 그런 것들을 이미지로 다루는 영화가 모던한 영화가 아닐까.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사랑>같은 영화를 보면 사람의 마음 속의 기억과 감정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것이 모던 영화의 시작을 대표한다고 본다. 이야기 자체는 약하지만 인간의 감정이 드러나고 캐릭터가 드러나는 영화들, 그러니까 홍상수나 로베르 브레송처럼, 대충 찍은 것 같아도 인간의 캐릭터가 매우 또렷이 보이는 영화들 말이다. 어떤 거대한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기억과 시간을 다루는 영화들, 인간 그 자체에 대해 다루는 영화들이 모던한 영화가 아닐까.
정성일: 회화의 결론 중의 하나가 인상주의에서 나왔다. 그래서 대상을 그리는 대신에 대상과 그림 사이에 있는 공기를 가지고 오고 싶어한 거다. 공기를 그릴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공기에 떨어지는 빛의 스펙트럼을 그리는 것뿐이다. 문제는 거기서 한걸음 나가는 순간 형상이 부서진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러니까 세잔 다음으로 도착하는 인물은, 피카소와 뒤샹과 베이컨이다. 그렇게 형상이 부서지기 시작하다보면 그다음부터 세상은 정확하게 몬드리안의 그림이 된다. 선과 면만 남는 거다. 영화는 시간이라는 것을 다루어 왔는데, 시간이라는 뇌의 스크린을 다루는 영화들은, 끝났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이 끝나갈때, 뇌의 스크린이 환상의 구조라고 말할때, 세상은 뭐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때 세상은 표면이 된다. 완전한 표면만 보인다. 나는 영화가 음악에 비해 유치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이 인간의 정신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리는 예술이라면 한없이 내려온 밑바닥에는 영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을 다루고자,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찍었다. 사건이란 사실상 이야기고, 이야기가 되어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화의 역사란 사실상 어떻게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매치 컷과 인비저블 커팅과 더블액션을 비롯한 수많은 방법들도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그런데 영화는 어느 순간 그것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시간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액션을 포기했고, 그것은 사건을 포기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시간으로 넘어갔지만, 영화가 시간을 포기할 때 그리하여 영화가 세상의 표면만 찍을 때, 그것은 힘을 잃어버렸다. 음악도 회화도 문학도 마찬가지다. 즉 이야기가 없는 영화들을 가지고 관객을 효과적으로 설득한다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키아로스타미의 <테이크5>는 50분 동안 다섯개 쇼트로만 이루어져있다. 첫번째 쇼트는 길을 보여주고, 두번째는 들판을 보여주고, 마지막 쇼트는 바다에 파도가 들어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세상의 표면을 보여주면서 세상을 다루는 것이다. 거기엔 시간도 없고 오직 세상의 표면이라는 것만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그것이 영화가 갈 마지막 길이라고 믿는 거다. 몬테이로가 찍은 <백설공주>는 대사는 들리지만 계속 검은 화면만 보인다. 그리고 가끔 하늘을 한번 보여준다. 그러니까 세상은 두 가지라는 거다. 하늘과 암흑으로 가득한 세상. 그 영화가 미학적으로 멀리 나간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가야만 하는지 질문할 필요는 있다. 문제는 만드는 사람도 비평도 그것이 극영화라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실험영화와 극영화가 있었지만, 나는 오늘날 남은 실험영화는 하나뿐인 것 같다. 현대의 실험영화는 광고다. 나머지는 다 그냥 영화라는 생각을 하는 거다.

 

정윤철: 우리는 아무리 컴퓨터그래픽이 많고 제작비가 많아도 스필버그의 영화가 현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미래를 찍는다고 해도 그건 기승전결 구조를 갖추고 헤피엔드로 끝나는 고전적인 영화다. 관객이 이 영화가 현대적인 영화구나 아니면 구시대적인 영화구나라는 것을 알면서 본다면, 영화를 보는 눈이 좀 밝아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관객들에게 현대적인 영화를 간단하게 정의해준다면.
정성일: 내가 보는 현대적인 영화는 피로를 찍은 영화다. 말하자면 보들레르가 말한 근대를 살아가는 피로, 속도로 살아가는 피로 말이다. 나는 영화가 그것을 다룰 때 모던한 것을 다룬다고 생각한다. 고다르와 레네와 허우샤오시엔과 린치를 볼때, 모던한 것을 살아가는 피로가 보인다. 피로의 감정, 피로의 인상, 피로의 감각이.

 

정윤철: <해변의 여인>을 보면서 홍상수가 한국에서 유일하게 모던한 것을 다루는 감독이 아닌가 했다. 모던의 특징은 피로함이라는 건가.
정성일: 그것은 영화가 주는 인상, 감각의 피로함이지, 조폭으로 사는 것의 피로함은 아니다(웃음). 거기에 현대영화의 핵심이 있지 않나 싶다. 왕가위의 영화를 보면 피로하지 않은가. 지아 장커의 <소무> <임소요> <세계>에서도 중국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속도로 살아가는 것의 피로함이 보인다. 심지

어 그 무게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

 

정윤철: 그렇다면 긍정적이거나 희망적인 영화는 현대적인 영화가 되기 힘든 것인가. 나는 <해변의 여인>을 보면서 피로감을 느꼈지만, 고현정이 차를 몰고 구덩이에 빠졌다가 거기서 빠져나와 해변을 달리는 장면을 보면서 다른 느낌을 보았다. 또다시 구덩이에 빠질 지도 모르지만, 힘들었던 시기를 지나고 달려나가는 인간의 뒷모습에서, 그래도 살아야지 어쩌겠어라는 느낌을 본 것이다.
정성일: 나는 정반대를 보았다. 그 차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유턴한다. 그 차가 갔던 길을 돌아올때 지옥으로의 영겁회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아마 그 차는 다시 구덩이에 빠질 거고, 고현정은 내년 봄에 다른 남자와 다시 해변에 오겠지, 하는. <해변의 여인>에 나오는 강아지는 동일한 강아지인데도 호명만 계속 변한다. 나는 대상과 호명 사이의 불일치, 그 사이에서 겪어야하는 피로를 봤다. 의도인지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좋지 아니한가>에 나오는 인물들도 모두 피로하다. 천호진은 완전히 지쳤고 황보라도 지쳤고 박해일도 지쳤다. 그 모두가 피로감에 어쩔 줄을 모른다. 그 정서는 <가족의 탄생>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복수를 하기 위해 그 무거운 총을 들고 돌아다녀야만 하는 금자도 피로한 거다. 그런 인물들이 모던한 영화 속에 나타나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정윤철: 그것은 주제적인 측면이 아닐까.
정성일: 그런 것을 주제로 다루지 않는 영화도 모두 거기에 휩싸여있다. 아니 오히려 <우아한 세계>처럼 피로를 다루는 영화는 피로하지 않다. 그 영화는 즉시 장르영화로 몰입하게 된다. 그런데 <좋지아니한가>는 피로함을 찍으려고 한 영화가 아니지만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을 찍기 때문에 피로를 피해가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피로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미국과 유럽의 영화들이 모두 그야말로 휩싸여 있다.

 

정윤철: 19세기에 고호와 세잔은 보잘것없는 존재였지만 지금은 역사에 크게 자리 잡고 있고, 당시 잘나가던 살롱전 입상 화가들은 루브르 지하창고에서 썩고 있다. 그렇게 볼 때 평론가의 역할은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지금 주목하고 있는 감독이 한국에 있는가.
정성일: 작년에 데뷔한 감독 중에서는 조창호와 신재인을 주목하고 있다. 두 감독 모두 주제와 형식에서 새로운 영화, 이제까지 없던 영화를 찍었다. 특히 신재인은 한국에서 본적이 없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다음 영화가 궁금하다.

 

정윤철: 중견감독은 어떤가
정성일: 임권택 감독의 다음 영화가 궁금하다. 홍상수와 김기덕의 다음 영화가 궁금하고, 정지우와 정윤철, 윤종찬, 임순례, 임상수의 다음 영화도 궁금하다. 박찬욱이 어떻게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다음 영화를 밀고나갈 것인가, 김지운이 어떻게 장르를 혁신할 것인가, 류승완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계속 방어할 것인가도 궁금하다. 지금 갑자기 떠올렸기 때문에 놓친 이름이 많을 거다.

 

정윤철: 가장 먼저 언급한 세 감독, 임권택과 홍상수와 김기덕에게 조금이라도 더 관심이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성일: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영화는 항상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반성적 성찰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같은 것을 반복하거나 뭔가 머뭇거리고 있거나 심지어 퇴행하고 있을 때, 그것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다. 무언가 앞으로 나아간 감독의 영화를 볼 때, 그리고 그것을 쫓아가려고 할 때, 비평가도 한걸음 나아간다. 같이 성장하는 것이다. 나쁜 감독의 영화를 계속 쓰면 비평가도 퇴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겐 그 세 명의 감독이 매우 소중하다.

 

정윤철: 한국영화의 문제에 대해 짚고 넘어가겠다. <친구>가 개봉한 다음에 당신은 그 영화의 성공에 어떤 사회적 무의식과 욕망이 담겨있는가를 물으며 지난 1년 동안 괴로웠다는 내용이 담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렇다면 7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의 무의식과 욕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성일: <좋지아니한가>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했던 이야긴데, 나는 한국영화가 갑자기 가족이라는 화두에 왜 이렇게 매달리고 있는지가 매우 크고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가족을 때려부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맹렬하게 가족과 싸우고 있다. 그런 점에서 <좋지아니한가>는 이래도 좋은가, 이렇게까지 부서져도 좋은가, 라고 반문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가족이 힘을 합해 싸우고 나서 집을 향해, 밥솥이 있는 집을 향해 뛰어올때, 비루하더라도 참고 사는게 좋지 않겠는가라고 물어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지아니한가>가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토록 가족과 싸워야만 하는지 생각해보니 한 가지가 떠올랐다. 내가 노무현 시대에 가장 납득할 수 없었던 스타는 문근영이었다. 문근영은 개인으로서는 착한 소녀지만, 저 소녀에게 스타라고 불릴 만한 힘이 있는지 의아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문근영에게 붙은 국민 여동생이라는 수식어였다. 왜 스타가 여동생이어야 하는가. 말하자면 가족주의인 것이다. 가족이 되어야만 스타를 사랑할 수 있다. 이 가족의 모습이 흉물스럽게 나타난 것이 월드컵이었다. 월드컵은 계급과 정치적 견해와 사회적인 삶의 질과 이해관계,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마법처럼 사라지고,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일치단결했을 때 보여준 무시무시한 하나 되기였다. 이것은 가족 되기의 또 다른 판본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관객 1400만명이 본 영화 <괴물>이 딸을 죽여야만 끝날 수 있었을 때 무시무시했다. 딸을 죽이면 이 가족은 복원이 안된다. <괴물>에서 변희봉은 이렇게 말한다. “얘들아, 현서가 죽어서 우리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런데 현서가 다시 죽었으므로 이 가족은 다시는 모이지 못할 것이다. 그 가족 부수기에서 나는 마법적 하나 되기와 국민 되기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가족을 부수면 정말 살 수 있어?’라는 질문을 <좋지아니한가>가 바인딩해서 되던진다는 느낌이었다. 이처럼 영화는 하나의 시대정신에 대한 무의식적인 메시지와 징후를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식으로 가족을 다룬 영화들이 <괴물>을 제외하고는 단 한편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여기에 동의하지 않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국민들은 여전히 하나 되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것은 무시무시하다.

 

정윤철: 5년 전에 진보적인 모든 세력이 노무현을 밀었다. 그런데 노무현은 패러다임의 변화가 올 정도로 에측불허의 행동을 했다. 적이라면 싸우면 되지만, 내부에서 그런 문제가 생기니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고, 가치관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됐다. 그런 것이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같다. 2,30년에 걸친 진보운동 끝에 노력하면 된다는 이성주의가 해피엔드를 맞는 듯했는데, 그것이 산산조각 나고 카오스 상태가 되어버린 것같다. 그야말로 신자유주의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영화는 탈역사화되고 흥미 위주로 가지 않겠는가. 우리가 믿었던 거대한 사상,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졌으니, 어디에 기댈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영화 자체로 파고들자, 영화만 잘 만들자, 그런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평가로서의 걱정은 없나?
정성일: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윤철: 돈이다.
정성일: 그걸 이데올로기로 말한다면?

 

정윤철: 개인이 잘 사는 것 아닐까?
정성일: 이런 생각을 해봤다. 각각의 시대는 이전 시대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내가 생각하기에 70년대는 교양의 시대였다. 그때는 <사상계>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을 비롯한 많은 계간지가 나왔고, 지금과는 다르게 파워가 있었다. 그런데 교양과 지성의 단점은 입으로만 떠들지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반작용으로 80년대는 행동의 시대가 되었다. 모두가 실천으로 나갔다. 그런데 정치의 결정의 다른 판본은 도그마이므로, 90년대는 다양성의 시대를 요구했다. 90년대는 문화의 시대였다. 막시즘만 진보가 아니고 페미니즘과 이반과 수많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진보를 말했다. 이 문화의 시대의 약점은 실속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실용주의가 된 것 같다. 지금 사람들은 실용적인 게 아니면 견디지를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동산과 주식에 미친 것이다. 나는 이 실용주의 시대에 대한 반작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내가 돗자리를 깔지 않았으니 모르겠지만(웃음), 새로운 대통령이 나오면 보일 것 같다. 실용주의 시대가 계속될지, 아니면 반작용이 나와 실용주의를 끝장내고 다른 시대를 불러올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것을 선점할 것인지 아니면 시대에 매달려 질질 끌려갈 것인지 지켜보아야 한다. 비평가는 예언하는 것이 직업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난 다음에 평하는 것이 직업이다. 비평이라는 것은 시대에서 가장 뒤에 오는 것이다.

 

정윤철: 스크린쿼터가 축소됐다. 영화인들은 다양성을 위해서 스크린쿼터 축소를 반대한다고 하지만 한국영화가 멀티플렉스를 독점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회의가 들기도 한다. 이제 스크린쿼터 축소는 기정사실화됐고, 앞으로는 극장과의 싸움이 남아있다. 우리는 생산자이고 관객은 소비자라면 극장은 유통사업자다. 영화를 관객과 만나게 해주는 극장은, 아무리 영화가 시대를 앞서가며 다양성을 창조한다고 하더라도, 돈이 되는 영화를 상영하려고 할거다. 그렇다면 투자자와 배급자가 같은 한국영화의 산업구조에서 과연 한국영화의 미래가 있는가라는 걱정이 든다. 교차상영같은 것들을 보면 극장의 파워가 너무 세진 것같다. 비평가에게 그런 것을 물어본다는 것이 애매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의견을 묻고 싶다.
정성일: 문제는 그걸 막을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부를 끌어들이는 것. 하지만 나는 그 방법이 여우를 내쫓기 위해 늑대를 끌어들이는 꼴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해도 그것을 운영하는 방식에 성패가 달려있다. 더구나 한국은 어떤 정당이 정권을 잡는가에 따라 운영방식이 너무나 유동적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진정성은 믿지만, 운영방식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는 우리들의 화두로 남을 수밖에 없지 않나싶다. 계속 몰고 나가면 자본주의를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건 너무 근본적이고 위험하다. 그리고 일개 영화평론가가 이야기하기엔…(웃음)

 

정윤철: 당신은 십몇 년 동안 한국영화를 지켜보아왔다. 그 동안 감독과 프로듀서에게 답답하거나 안타까웠던 것은 없었는지 묻고 싶다.
정성일: 나에게 신기한 것은 한국의 프로듀서는 신인감독을 너무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들(프로듀서들)은 사실상 감독이나 마찬가지다. 감독을 하고 싶은데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는 싫은 거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감독은 일종의 카게무샤인 셈이다. 죽으면 까내고 또 까내고. 나는 모시고는 일을 못하겠다는 거지. 이렇게 된다면 프로듀서와 감독의 관계는 창조적인 관계가 되기 힘들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머리가 큰 감독들은 프로듀서를 제작부장처럼 쓰고 싶어할 뿐이고 의논 상대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머리 큰 감독과 머리 큰 프로듀서가 만나 멋진 결과를 끌어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창작에 대한 감독의 고민과 시스템적인 힘과 창조적인 의논의 대상으로서 프로듀서가 만나 변증법적으로 승화된 결과가 없는 것이다. 이건 제도나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당사자들이 이런 결과에 관해 반성적으로 물어봐야만 한다.

 

정윤철: <매트릭스> DVD에 메이킹 필름이 수록돼 있는데, 프로듀서인 조엘 실버가 헬기 위에 턱하니 앉아 인터뷰를 한다. 그는 50줄에 접어든 중견이다. 차승재 대표하고 나이도 비슷하고 외모도 비슷한데(웃음), 현장에서 뛰는 모습이 보기 좋더라. 한국에선 웬만한 프로듀서는 삼십대에 이미 영화사를 차리지 않나. 물론 감독들도 많이 그러기는 하지만. 그래도 감독은 현장에서 뛰는데, 프로듀서는 30대 후반쯤 되면 현장에서 보기 힘들다. 40대 감독은 가끔 있지만 40대에 현장에서 뛰는 프로듀서들이 얼마나 있는가. 감독은 신인이 많다고 하더라도 4,50대의 프로듀서가 필요한데 말이다. 현장 경험이 많은 프로듀서들이 많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한국영화는 그런 모습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성일: 나는 안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바깥에서 보기엔 감독과 프로듀서가 의논해 예술적 창작을 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정윤철: 이번에는 <오아시스>에 관해 묻고 싶다. 당신은 <오아시스>에 관해 <씨네21>에 기고한 매우 긴 글에서 그 영화는 환상을 만들고 있다, 장애인이 소재지만 가부장적인 이야기를 한다, 고 말했다. 그런데 이창동 감독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두 보잘것없는 인간들 사이에 생겨난 사랑 말이다. 홍종두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정상적인 판단력이 부족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다.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과 육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장애가 없는 사람과 같은 것을 기대하기란 힘이 드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하여 영화 전체가 위험하고 문제가 크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정성일: 나는 한공주와 홍종두를 가련하게 생각한다. 진심으로 두 사람이 잘됐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고 사랑을 맺었으면 좋겠다. 내가 역겹게 생각하는 건 이 영화가 환상을 만들어가는 구조다. 이야기는 사랑인데, 이야기의 이데올로기는 가부장제다. 공주와 종두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런데 그들을 맺어주는 구조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생산 구조와 정확하게 맞물려 있다. 그래서 나는 <오아시스>가 보수적일 뿐만 아니라,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위험한 수준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오아시스>는, 영화가 끝난 다음에 어떤 비극이 다시 올지는 모른다고 해도, 행복할 것 같은 조짐을 보이며 끝난다. 하지만 그런 영화는 굉장히 많다. 행복의 조짐으로 끝나는 것이 그렇게 잘못인가.
정성일: 나는 <오아시스>의 마지막을 믿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종두는 감옥에 갔으니 별 네 개를 달고 나올 거다. <오아시스>는 모든 이야기를 한시간만에 빨리 끝내고 그 다음으로 갔어야만 했다. 별 네 개를 달고 나온 전과자가 공주와 행복할 수 있는가, 그들은 그런 현실을 견딜 수 있는가. 그 이야기가 있어야만 <오아시스>는 오아시스가 있는지, 너희는 정말 복지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장애인과 더불어 살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아시스>는 그 직전에 끝난다. 종두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함께 희망이 보이는 것처럼. 더 망연자실한 것은 그 장면에서 공주가 바닥을 청소하는데, 그것은 정확하게 아내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그 쇼트를 결합해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는 것처럼 끝내는 것은 완전한 환상이다. 거기에서 완벽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장애인이 아닌 우리다. 우리를 환상의 구조에 밀어 넣고선, 우리는 공주와 종두가 얼마나 불쌍한지 알고 있어, 우리는 그들을 동정했어, 라고 면죄부를 주는 거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같은 사회에서 공존의 방식을 묻고 있는가. <오아시스>가 그저 전과자와 교육받지 못한 여자의 문제라면 거기서 끝나도 된다. 하지만 장애인을 끌어들이고 별넷단 남자를 끌어들였다면, 그들이 정말 이 사회를 견딜 수 있는가를 물어야한다.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을 생각해보자. 만약 <길소뜸>이 신성일과 김지미가 아들을 찾으러 가는 장면에서 끝났다면, 열린 구조이기 때문에 멋있을 수 있었을 거다. 관객은 그들이 아들을 만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길소뜸>은 모든 이야기를 한 시간으로 압축하고 1시간 5분만에 어머니가 쓰레기가 되어 있는 아들을 만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녀는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지저분한 아들을 싫어하고 경멸한다. <길소뜸>은 분단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이 만났을 때 그들은 정말 잘 살았을까, 라는 공존의 문제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런데 <오아시스>는 공존의 정치학을 질문해야하는 시점에서, 왜 영화를 끝내버리는 것인가. 앞의 이야기를 한시간 만에 끝내고 종두가 감옥에서 나왔다면 이 영화를 그렇게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앞의 이야기가 없더라도 관객은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질문을 던져야하는 순간 영화를 끝내는 행위는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납득할 수 없다. 그럴 바에는 왜 이야기를 꺼냈느냐는 거다. 나도 얼마 안되는 원고료를 쪼개 성금을 보내지만, 그런 행동이 스스로도 역겹다. 면죄부를 받는 거거든.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헌금을 내는 것과 같다. 이 돈을 내면 죄사함을 받을 거야. 그런데 죄가 사해지는가.

 

정윤철: 이창동 감독은 가난과 힘든 삶과 공존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랑을 말하고 싶었던 것같다. 그들도 우리처럼 사랑할 수 있다, 더 솔직하게 사랑할 수 있다고. 종두가 공주방의 창문을 가리는 나무를 잘라주듯이, 이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텐데.
정성일: 그렇다면 그것이 신파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신파를 하면서 장애인을 끌어들이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오아시스>는 장애인을 가장 비참한 데까지 끌어내어 영화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체적 우위에 서게 만들고, 가련함이라는 감정을 자동적으로 끌어낸다. 만약 공주네 집에 돈이 무지 많아 유일한 문제는 장애일 뿐인데, 종두를 만나 같이 산다. 그러면 보는 사람은 화가 날거다. 인간은 동정심을 만들어 내는 자동인형 같은 반응을 영화 안에 전제하고 있거든.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던질 때에 사랑은 정말 본질적인 것인가, 라고 반문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의 다른 판본은 “나 너랑 하고 싶어”다. 모든 숭고한 말에는 외설적인 이면이 있다. 그런데 <오아시스>는 숭고한 면만 있는 것처럼 진행하며 외설적인 이면이 습격해 오는 것을 온갖 방식으로 방어한다. 그러므로 내게는 이 영화가 매우 값싼 신파처럼 보이는 거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게 걸작을 찍은 것처럼 얘기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정윤철: 해피엔드를 싫어하는 건가.
정성일: 납득할 수 있다면 좋아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해피엔드는 기만이다. 대부분의 비극이 기만인 것처럼. 절대적인 비극과 해피엔드가 가능한 것인가.

 

정윤철: 그 말을 뒤집어 이야기하자면 비극적인 엔딩을 바라는 것도 아니라는 뜻인데.
정성일: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현실로 돌아가야하니까.

 

정윤철: 그렇다면 납득할 수 있는 엔딩을 좋아하는 거겠다.
정성일: 정확하게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을 견딜 수 있는 엔딩을 좋아한다.

 

정윤철: 무식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정치와 윤리와 미학에 순위를 매긴다면.
정성일: 윤리가 가장 먼저다.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것은 영화에 따라 위치가 뒤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만약 <오아시스>와 장애인 소재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를 비교한다면 어떤가.
정성일: 물론 <오아시스>가 훌륭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는 상업영화고, <오아시스>는 내러티브 구조나 형식에 있어서 이창동이라는 감독의 미학적인 시도들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아시스>는 나의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을 견디지 못했다. 내가 <오아시스>에 관해 그렇게 길게 썼던 것도 그 영화에 미학적인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정치적이고 윤리적으로 동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정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 거다.

 

정윤철: 나도 <오아시스>의 엔딩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신은 종두가 강간을 했고,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쇼트를 교묘하게 배치했다고 썼는데, 우리도 알다시피 종두는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남자가 아닌가. 그러니까 강간을 하고 나서도 집에 가서는 엄마하고 묵찌빠를 하면서 노는 거고.
정성일: 내 얘기가 그거다. 종두 같은 인간은 언제든지 공주를 강간할 수 있다. 그런 일은 대한민국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이다. 그게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장면을 왜 그렇게 붙여놓았느냐는 거다. 마치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것처럼. 어떤 남자가 강간을 하고 집에 가서 엄마하고 묵찌빠를 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강간신 다음에 이걸 붙여놓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나는 종두는 용서할 수 있지만, 그렇게 붙여놓은 편집은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오아시스>에서 역겹게 생각하는 건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 시네마틱한 부분이다. 공주가 종두에게 전화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그사이에 옆집 부부가 공주 집에 와서 섹스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오빠 부부가 공주를 장애인 임대 아파트에 데리고 가서 함께 사는 것처럼 거짓말하는 장면을 보여주는가. 물론 그런 인간은 무지하게 많다. 하지만 강간과 묵찌빠와 섹스와 오빠라니. 그 다음에 공주가 전화 거는 장면이 나오면 관객은 자동적으로 공주도 섹스하고 싶은 거야, 라며 강간을 용서하게 된다. 그런 편집은 너무나 비윤리적이다.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영화에서 이미지는 전적으로 운이다. 그 순간 바람이 불 수도 있고 해가 비칠 수도 있고 구름이 지나가며 얼굴에 그늘이 질 수도 있다. 하지만 구름이 지나간 다음에 한 여자의 얼굴이 붙는 것은 백만분의 일의 우연도 아니다. 나는 <오아시스>가 그런 식으로 장면을 붙인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당신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다세포 소녀>에 관한 비평도 썼는데, 이런 영화까지 정치적인 기준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이, 나는 조금 그랬다.
정성일: 나는 그 두 편의 영화가 굉장히 정치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정윤철: 어떤 면에서 정치적이라는 건가. 당신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마지막을 비판했는데, 그처럼 판타지적인 엔딩에서 어떻게 정치적인 보수성을 발견했는지 궁금하다.
정성일: 왜 판타지로 피해갔느냐는 거다. 판타지가 동원되는 것이 이 영화에서 그렇게 중요했을까. 나는 그 영화를 보며 <오아시스>와 똑같은 궁금증을 품게 됐다. 그런 엔딩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엔딩 다음에 왜 정신병원이 나오는 에필로그를 붙였을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문득 질문하게 만든다. 어느 쪽이 진짜인가. 그렇다면 이 영화가 진짜 다루고 싶었던 것은 정신병원인가 정신병인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그 에필로그는 구조로만 따지면 전혀 필요가 없는데, 무엇을 매개하는지 답을 피하기 위해 구태여 갖다 놓은 것이다. 그것은 질문을 피하기 위한 알리바이다.

 

정윤철: 정신병인지 정신병원인지 하는 질문이 왜 중요한 것인가.
정성일: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대상이 문제인가,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목표가 생기기 때문이다.

 

정윤철: 누가 보더라도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영군과 일순이 주인공이고, 그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지가 메인 플롯으로 보이지 않을까.
정성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박찬욱의 재능이고 그 안에 알레고리를 짜넣은 것도 그의 솜씨다. 하지만 그가 너무 나이브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윤철: 그들이 맺어지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라는 것인지.
정성일: 그건 상관없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둘만의 이야기로 끝나버리는 것이 반동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영군과 일순을 비롯해 이 병원의 모든 인물은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그것은 이 병원이 한국사회의 압축판이라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병을 안에 숨기고 살아가지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그걸 뒤집어놓았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이 세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끝을 낼 것인가, 환상 밖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환상을 유지할 것인가, 질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정신병원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그러니까 이건 정신병원을 찍은 걸까 정신병을 찍은 걸까라고 질문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박찬욱은 정치적인 것을 피해가고자 마지막에 그런 질문을 밀어넣었던 것이다. 왜 마지막에 패러다임을 완전히 지우는가. 박찬욱은 그것이 재미있었을지 모르지만 내겐 아니었다. 도대체 1시간 40분 동안 내가 보았던 영화는 무엇이었는가. 이 정신병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남한은 이 수많은 모순을 어떻게 할 것인가와 똑같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러 박찬욱은 질문을 바꾼 것이다. 그것은 기만이다. 나는 문득 박찬욱은 용기가 없었거나 엔딩을 찾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엔딩을 찾지 못했다고 얘기하든지, 나는 그렇게까지 밀고나가고 싶지 않았다고 얘기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라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영화 전체와 에필로그, 두개의 신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쪽에서 에필로그를 볼 것인가, 에필로그 쪽에서 영화를 볼 것인가, 에 따라 영화가 달라진다. <괴물>이 그런 영화다. <괴물>은 세 개의 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롤로그와 영화 전체, 그리고 송강호가 어두운 매점에 앉아 눈을 희번덕거리는 마지막 신. 의미심장하게도 이 세번째 신은 한강인데도 세트에서 찍은 장면이다. 한강이 나오는 모든 장면을 진짜 한강에서 찍었는데, 이 장면만 세트였던 것이다. 그순간 세상은 시뮬라크라가 되고, 영화는 질문한다. 어느 쪽이 진짜인가.

 

정윤철: 당신은 <다세포 소녀>가 프롤레타리아의 사랑을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다세포 소녀>는 만화같고 키치적인 영화다. 물론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를 아무 생각없이 쓰기는 했다. 하지만 코미디조차 그렇게 보아야만 할까.
정성일: 원작만화에서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재용은 왜 수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그 소녀를 택했는가. 성적 취향의 다양성을 드러내자면 너무나 많은 인물이 있었다. 아니면 만화처럼 인물을 옮겨다닐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런데도 영화는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에게 고정점을 두고 있으므로, 그녀의 퍼스펙티브로 영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이 영화에서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성적 취향에는 그토록 자유롭고 관대하면서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문제로 삼은 것은 각색이었다. 영화는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나오는 하나의 조합이다.

 

정윤철: 코미디는 장르적인 특성을 고려해야만 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씹는 맛에 보는 영화인데 너무 정색을 하면 문제가 있지 않나.
정성일: 코미디를 만들 때는 풍자의 관대함과 풍자의 날카로움이 있다. <다세포 소녀>가 풍자의 관대함을 성적 자유에 맞춘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풍자의 엄격함이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에게 맞춰진 것에 관해선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세포 소녀>를 이야기하면서 완성도는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성적 취향에는 이토록 관대하고 판타지를 투영하는 영화가 계급 문제에 있어서는 왜 이렇게 현실적인가를 묻고 싶다.

 

정윤철: 코미디나 대중영화에 있어서까지 그렇게 정치적인 것을 고려해야만 하는 걸까.
정성일: 나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정치적인 것을 주장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핵심이 되는 질문은 이런 거다. 만약 민주주의를 다룬다면, 그걸로 무엇을 얻고 싶은 건데? 예를 들면 누군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다. 이스라엘에 군사자금을 대겠다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없지만 거기서 커피를 마시는 반복적인 행위가 결국엔 팔레스타인 아이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리는 행동이 된다. 그것이 가지는 무의식적인 정치적 함의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거다. 나는 정치가 너무 싫다고 하면서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 놀러가는 것도 결국 정치적 행위인 것이다.

 

정윤철: 선거를 피하는 것은 기회를 없애는 거지만 영화를 만드는 것은 어떤 기회를 만드는 것이 기에 더 중요하다는 것인가?
정성일: 수많은 이야기와 인물 중에서 하필 그것을 선택한 정치적 의도가 무엇인가. 예를 들면 <좋지 아니한가>에서 천호진이 굳이 학교 선생님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학교 교사인지 직장에 다니는지 자영업을 하는지에 따라 의미의 방점이 이동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정치적인 의도가 없다고 해도 그것이 불러 일으키는 효과마저 비정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이펙트를 따지자는 거다. 의도가 무엇인지는 의미가 없다. 의도를 묻는 것은 예술을 창백하게 만들 수 있다. 의도는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그 의도가 가져오는 이펙트에 대해선 물어야한다고 믿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보수적이라고 그의 영화까지 보수적이라고 하지 않지 않는가. 물론 그의 영화에는 많은 보수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러나 그 이펙트는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에 봉사하지 않는다. 이스트우드가 공화당에 찬성한다고 하여 그의 영화도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건 바보짓이다. 마찬가지로 감독이 민노당을 지지한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진보적인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다. 나는 그에게 비슷한 논쟁이 벌어졌던 <아멜리에>에 대한 키노의 기사를 보여준다.

 

<아멜리에>의 열기가 계속되자 ‘리베라시옹'지는 정치가들에게 입장을 물었다. “순진함이 신선했다”고 한 우익 장관에서, 반자본주의 투쟁을 읽어낸 파리 공산당 부시장까지 반응은 모두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좌익 공화 단체 ’제네라시옹 레퓌블리끄‘도 “민중을 진솔하게 그렸다”고 영화를 칭찬했다. 반면 카간스끼는 <아멜리에>의 감상적 파리묘사를 국민전선 선전 비디오 같다고 비난했다.’리베라시옹‘도 호평은 했지만 한 기자는 주네가 가장 저급한 ’프랑스다움‘을 이용했다는 암시를 남겼다. “아코디언 음악, 서민 구역, 프랑스기...섬뜩하다. 프랑스는 이런 과거를 가진 별 볼일 없는 국가일 뿐이다.”
<아멜리에>의 내용을 생각하면 이런 분석은 과민반응이다. 찬반 양 진영 모두 영화가 코미디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 같다. 코미디는 과장과 특정한 연기를 통해 사회현실을 모방하면서 동시에 거리를 두는, 따라서 이념적으로 양면적인 장르다. 코미디는 소위 진지한 장르가 무시하는 문제들을 이슈화하고, 동시에 종종 보수적 결론으로 그것을 무마한다.
(..중략..)
비시정권하에서 나치 협력이란 치욕의 역사를 겪은 프랑스인들은 전후 무엇이든 그쪽으로 해석할 만큼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다. <아멜리에>는 따라서 저항이냐 협력이냐 하는 싸움이 전개되는 최신 전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비시 정권하에는 사실 저항에서 무관심, 비겁, 암시장 등쳐먹기, 파시스트 협력 등 다양한 입장의 행동들이 존재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늘 그렇듯이 백퍼센트 좌파, 백퍼센트 우파 행동이란 건 없다. <아멜리에>에 대한 이런 해석은 상관없는 작품에서 부당하게 역사적 경험을 읽어내는 것이다.
-키노 2001년 1월호 SIGHT & SOUND 기사 번역문 중.

 

정윤철: 단 한순간만이라도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잊고 즐기고 싶은 욕망도 있지 않나. 그래서 영화를 보는 거고.
정성일: 그 순간 그것은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자살해버리는 거다.

 

정윤철: 하지만 살다가 힘들면 죽고 싶듯이 영화를 보며 가상으로나마 사회적으로 자살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정성일: 어떤 인간에게도 생명을 포기할 권리는 없다. 그것은 비윤리적이다. 사회적으로 자살하겠다고 하는 순간 사람은 훨씬 곤란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자기를 진짜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정윤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좋겠지만, 그런 싸움은 너무도 지난한 것이다.
정성일: 1969년 동경대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농성을 하던 전공투 극좌파 학생들이 잡혀갈때 누군가 벽에 낙서를 남겼다.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하는 싸움이 있다고. 그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는 거다.

 

정윤철: 요즘 세대는 책읽기도 싫어하고 인터넷 20자평에 모든 영화의 운명이 왔다갔다 하고 있다. 당신은 앞으로도 계속 평론을 써야하는데 어떤 전술을 택할 것인가.
정성일: 나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런 태도가 더욱 만연했으면 좋겠다. 20자평도 귀찮아, 나에게 10자평만 줘, 이렇게. 그렇게 된다면 다음 세대가 지금을 비웃으며 반작용을 보이지 않을까. 80년대에는 모두 정치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90년대에 타르코프스키와 키아로스타미와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들이 몇 만 관객을 동원했다. 그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죽은 게 아니지만, 그때 조금 과하기도 했다. 그래서 반발이 일어났다. 나를 즐겁게 해줘. 나는 지금 현상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계속 방관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윤철: 당신은 <키노>에 글을 쓰면서 <스바키 산주로>에서 주인공인 산주로가 아이들을 뒤돌아보며 던지는 마지막 장면의 대사를 인용한 적이 있다. “바보 자식들, 이제부터 너희들의 시대인 거야, 너희들이 어른이라구! ” 그렇다면 평론을 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는가, 이제부터 너희들의 시대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가.
정성일: 영화평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부산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 와서 했던 말이다. 그는 프랑스 영화학교인 이덱에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이수하지 않으면 학교를 떠나야하는 필수과목이 있었다. 쇼트 나누기였는데, 앙겔로풀로스는 고전적인 편집방식이 너무 싫어서 선생이 요구하는 방식과 다르게 콘티를 짰다. 그러자 선생이 말했다. 앙겔로풀로스,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당신의 천재성은 그리스에서나 발휘하고 지금은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던지 학교를 나가라. 앙겔로풀로스는 밤새도록 고민하며 물었다고 한다. 나는 영화를 원하는가 그리고 영화는 나를 원하는가. 그리고 학교를 떠나 결국 그리스로 돌아갔다고 한다. 나도 묻고 싶다. 내가 글쓰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글쓰기도 나를 원하는가. 어떤 영화는 글쓰기를 요구하지만 어떤 영화는 감흥이 없다. 완성도를 떠나 아무런 화학작용이 없는데도 글을 쓰는 건 자신과 영화 모두를 망가뜨리는 거고 쥐어짜는 거다.

 

정윤철: 마지막 질문이다. <키노>를 떠난 후 감독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완벽한 영화는 아직 찍지 않은 영화라고 한다. 언제쯤 완벽하지 못한 영화를 우리에게 보여 줄 생각인가.
정성일: 내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이유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 이런 생각은 아니다. 그런 건 유치한 20대에나 가능한 생각일 거다. 나는 책상에서 혼자 영화를 하는 것에 한계에 부딪쳤다. 생각이 나가지 않는다.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책을 보고 여러가지 방법을 써도, 내게 남은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더라. 함께 영화를 만드는 것. 나는 영화의 가장 큰 힘은 여러 사람이 같이 만드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한 숏과 신을 놓고 나눌 것인가 붙일 것인가, 나누는 것이 결단인가 나누지 않는 것이 세상에 순응하는 것인가, 토론하고 싶다. 나는 세상과 영화에 대해 더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영화에 대해 아직 욕심이 있고 더 멀리 가보고 싶다. 내 생각을 더 멀리 밀고 나가고 싶다. 학생 시절에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나는 영화에 대해 쓰는 것과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영화에 관해 토론하고, 어떻게 찍을까 붙일까 나눌까 고민을 하는 거였으니까.

 

정윤철: 마지막으로 <씨네21>에 바라는 바는 없는가.
정성일: 이건 아주 특별한 표현이다. 필사적으로 버틸 것. 나는 <키노>를 해봤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알고 있다.

 
글 일일편집장 정윤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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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때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된 영화평론가 정성일씨.

중학교 1학년때 그 탈바가지 미술 과제가 없었다면,

미술숙제하느라 새벽까지 고뇌하지 않았다면,

내인생에서 정은임과 정성일을 더늦게 혹은

못만났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보는 나 


 

Posted by 판타스틱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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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켓오픈 2009년 1월 19일(월) 오후 2시

일시 : 2009/02/14 ~ 2009/03/22
장소 :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출연 : 김수로, 엄기준, 한동규, 차정환.. 
관람시간    : 100분 

누추한 동네의 다양한 군상, 술과 노래와 절망에 취한 밤이 또 시작된다!
러시아의 어느 허름한 선술집,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술잔을 부딪치고, 흥겹게 춤을 춘다. 까스트일로프백작 대신 감옥에 갔던 페페르의 출소를 환영하는 자리에 모인 것. 다 함께 웃고 떠들지만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생각에 빠져있다. 그들의 삶은 고달프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맑은 미소를 머금은 여인 나타샤, 이들의 삶에 희망을 전염시킬 수 있을까?
선술집에 일자리를 구하러 나타난 여인, 나타샤. 씩씩하고 밝은 모습의 그녀는 사람들이 잊고 있던 희망을 꿈꾸게 한다. 백작에게 연인을 빼앗긴 페페르는 나타샤에게서 새로운 사랑을 발견하지만 백작부인의 질투 어린 시선은 어쩐지 불행을 부를 것 같아 보인다. 과연 나타샤가 몰고 온 행복 바이러스는 그들의 삶에 번질 수 있을까?

절망이 희망으로 전이되고, 무대와 객석은 열기로 하나가 된다!
막심 고리끼의 원작 <밑바닥>을 과감하게 헝클어 새로 짠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희망을 포기하고 사는 밑바닥 인생들을 통해 그래도 희망은 계속되고 삶은 이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이 뮤지컬의 가장 큰 성공요인은 바로 100% 순수 창작곡으로 이루어진 주옥 같은 음악으로 제11회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음악상을 수상(박용전)하였다. 이제 <밑바닥에서>는 800회 공연을 돌파하며, 2005년 시작된 관객의 전율과 열기를 더욱 뜨겁게 이어갈 것이다

CAST SCHEDULE

공연일정   페펠 사틴
2/14/토 pm3 김수로 엄기준
  pm7 김수로 엄기준
2/15/일 pm3 김수로 엄기준
2/17/화 pm8 차정환 엄기준
2/19/목 pm8 차정환 한동규
2/20/금 pm8 김수로 한동규
2/21/토 pm8 김수로 한동규
2/21/토 pm3 김수로 엄기준
  pm7 김수로 엄기준
2/22/일 pm3 김수로 한동규
2/24/화 pm8 차정환 엄기준
2/25/수 pm8 차정환 한동규
2/26/목 pm8 김수로 한동규
2/27/금 pm8 김수로 한동규
2/28/토 pm3 김수로 엄기준
  pm7 김수로 엄기준
3/1/일 pm3 김수로 한동규

- 주    최 : (주) 컨텐츠아이 / 주관 : (주) 쇼플레이 / 제작 : 극단 유, 유시어터
- 공연문의 : (주)쇼플레이 02-556-5910


내용출처:플레이디비,인터파크

Posted by 판타스틱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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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손홍주 (사진부 팀장) | 2007.05.08

정윤철: 일단 트뤼포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겠다. 그는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고, 마지막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도 영화를 사랑하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인터넷 별점을 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씨네21> 기사를 보는 것이고, 마지막은 정성일의 글을 읽는 것이다(웃음). 이번에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당신의 글을 많이 뒤적거려봤다. 그런데 굉장히 옛날에 썼던 글이 있더라. 성균관대 3학년 때 쓴 영화평이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정성일 학생의 글은 어떨까 궁금했다. 그런데, 똑같이 어려웠다(웃음). 놀랍기도 하고 사람은 정말 바뀌는 게 아니구나 싶기도 했다. 대체 영화는 언제부터 좋아했고 글은 언제부터 썼나.
정성일: 프랑스 문화원에 다니면서 내가 본 영화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정리를 해야만 했던 이유는 일단 어린 나로서는 영어자막을 읽기가 힘이 들었고, 그러니 영화를 보고 나서도 무슨 말인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씨네21>도 인터넷도 없고, 참고할 어떤 자료도 없던 시절이었다. 불어를 모르니까 내가 본 영화의 감독 이름을 읽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영화를 보고 나면 너무 이상한 느낌이 있으니까 그걸 머릿 속에서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윤철: 그래도 영화잡지는 있지 않았나
정성일: <스크린>도 나오기 전이었다. <스크린>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야 창간됐다.

 

정윤철: 대중적인 자료는 전혀 없었으니 혼자 글짓기하듯 쓰는 셈이었겠다.
정성일: 어떤 글도 참고할 수 없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게 고마웠다.

 

정윤철: 그렇다면 독자적으로 초식을 닦았다는 건데, 중학교 3학년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프랑스 문화원에 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 아닌가. 형이 있었다든지 해서,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할 수 있는 환경이었는지.
정성일: 내가 장남이니까 형은 없었고, 어머니가 영화관에 데리고 갔다. 내가 돈을 내고 혼자 영화를 보기 시작한 건 국민학교 4학년 때 부터다. 주로 재개봉관에 가서 영화를 많이 봤다. 주로 쇼브라더스와 장철의 무협영화들을 미친 듯이 봤는데 성북구 일대 영화관은 안 다닌 데가 없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때 라디오 영화 프로그램을 들었는데, 자주 나오는 음악 중의 하나가 영화 <금지된 장난> 주제곡인 ‘로망스’였다. 이 영화가 죽인다는데 볼 수가 없는 거다. 그때는 비디오도 없었고, TV에서 방영되는 <명화극장> 같은 것도 모두 할리우드 영화였으니까. 1974년 즈음인가, 좌우간 내가 중3일 때, 우연히 신문 구석에 있는 작은 기사를 보니 프랑스 문화원에서 <금지된 장난>을 상영한다는 거다.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해서 찾아갔다. 막상 갔더니 <금지된 장난>은 다음 회여서 엉뚱한 영화를 먼저 보게 됐다. 그게 고다르의 <기관총 부대>였다.

 

정윤철: 고다르도 알았단 말인가? 벌써?
정성일: 알 리가 없지. 중3인데. 좌우간 <금지된 장난>은 기대했던 것보다 전혀 심금을 울리지 않았고 왜 좋은 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기관총 부대>는 미학적으로 어떤지 어린애가 알 리가 없었

는데도 쇼크가 너무 컸다.

 

정윤철: 어떤 영화였길래...
정성일: 제목과는 달리 군대 영화는 아니다. 배경은 현대인데도, 시골에 살던 두 청년이 전쟁이 벌어졌으니까 입대하라는 왕의 명령서를 받고, 전쟁이면 재미있겠다, 그러면서 전쟁에 나가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를 작은 전투들을 쫓아다니는 것처럼 찍어서 풍자한 영화였다. 그 영화를 보고 내가 쇼크를 받았던 이유는, 나는 이게 스스로 너무 자랑스러운데(웃음), 영화를 ‘카메라로 찍는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던 거다. 화면에서 카메라를 본 거다. 그때까지는 주인공과 이야기만 쫓아갔었다. 그런데 <기관총 부대>를 보다가 문득 “아, 영화는 카메라로 찍는 거지”라는 생각을 했다. 카메라라는 존재를 알게 된 거다. 그렇게 영화에서 카메라라는 존재를 발견한 다음부터 내 안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그땐 정확하게 몰랐지만 영화를 보는 내 태도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이야기에 몰두할 수 없었고, 더 이상 주인공을 쫓아가지 않았다. 영화라는 것은 카메라를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윤철: 카메라의 존재감을 느꼈다는 건가. 그렇다면 영화에 몰입하기가 어려웠겠다.
정성일: 나를 밀쳐낸 거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환상에 동화가 안 되는 거지.

 

정윤철: 그런데 고다르는 그런 점을 의도하는 감독 아닌가. 그런 걸 모르고 그의 영화를 보았는데 도 그런 점이 느껴지던가.
정성일: 만약 고다르가 브레히트의 방법을 사용했다는 등의 사실을 알고 봤다면 오히려 쇼크를 안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영화에 대한 교양이 전혀 없는, 영화라고는 오직 홍콩영화와 액션영화와 주말의 명화극장에 홀려있던 애한테, 무방비 상태의 애에게 환상에서 빠져나오는 소외 효과를 바로 느끼게 한 거다. 그때부터 영화를 보고 정리를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중3 때였다. 그때 <금지된 장난>만 보고 돌아왔다면 그것을 깨닫기까지 훨씬 오래 걸렸을 것이다.

 

정윤철: 중3때 프랑스 문화원이라...대단하다. 당시 그곳의 최연소 관객이었겠다.
정성일: 그땐 이상하게도 그런 애들이 몇 있었다. 중3 마지막 무렵, 11월부터 다니기 시작했는데, 예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고 해서, 아주 특별한 학생은 아니었다.

 

정윤철: 듣자하니 학창시절 때 한가닥 했다는데? 주먹 좀 썼다는 게 사실인가?
정성일: 철없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때 그랬는데, 별 얘기 다하게 되네(웃음) 그때 이미 지금만큼 키가 커서 70명 중에서 65번, 64번 이랬다. 이미 집안은 기울기 시작했고, 집으로부터 풀려나기도 했고, 뒤에 있는 애들이랑 어울리다보니 그렇게 됐다. (주먹을 들어보이며) 싸움이란 건 처음에 사람 한번 때리기가 힘든 거지, 그 다음부턴 때리는 건 일도 아니게 된다. 처음에 주먹 날리는 건 힘들었다. 윤리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한번 하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질 것 같으면 의자를 들어서 내리치고, 상대에게 겁을 주려고 맨주먹으로 유리창을 깼다. 한 1년 반을 진짜 막 살았다. 나는 지금도 싸우다가 접질린 오른쪽 손이 완전히 안 젖혀진다.

 

놀랍게도 그의 주먹엔 아직도 굳은살이 박혀 있다. 후진 영화를 보고 감독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들 때마다 요즘도 집에서 혼자 벽을 치는 걸까?

 

정윤철: 프랑스 문화원에 다니면서 그랬다는 건가.
정성일: 아니, 중학교 1,2학년 때였다.

 

정윤철: 고다르를 만나기 전이었군.
정성일: 그때는 홍콩영화만 봤으니까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일치를 한 거다(웃음). 집안이 어려우니까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고. 그런데 더 이상 이러면 안 되겠구나 생각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학교 2학년 마지막 날이었는데 친한 친구가 청소를 안 하고 도망갔다가 붙잡혀서 애들 앞에서 뺨을 맞았다. 근데 이 녀석이 우리 아버지도 내 뺨을 안 때린다며 선생을 때렸다. 아무리 친한 친구지만 저건 아니다 싶었다. 그러고 3학년에 올라갔더니 담임이 불러다가 너 걔랑 제일 친하다며, 나는 때리지 마라, 그러더라. 물론 농담이었겠지만. 좌우간 그때 이후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뒤에서 놀던 애들하고 떨어졌는데, 공부하는 아이들은 내가 무서운 거야. 1, 2학년때 모습을 봤으니까. 그런 식으로 학교에서 고립이 되다 보니 더욱 영화에 몰입을 했다. <금지된 장난>은 중학교 1,2학년 때부터 궁금했던 영화지만, 신문에 난 상영 기사를 보는 순간 점화 되는 느낌이었다. 피리 부는 사내에게 끌려가는 아이들처럼, 그렇게 홀리듯 프랑스 문화원에 갔다. 그런 식으로 문화원 다니면서 영화 보고 나서 혼자서 글을 계속 쓰다가 대학에 갔는데, 워낙 친구들 사이에서 영화 좋아한다고 소문이 났었고 과도 신문방송학과이다 보니, 학보사에서 일하는 친구가 한번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영화평을 쓰기 시작했다.

 

정윤철: 연극영화과에 갈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건가.
정성일: 그것이 정윤철 감독 세대와 내 세대의 차이다. 내가 영화를 공부하겠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보고 있던 TV를 때리더니 정신 차리고 공부나 하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계속 TV를 보시더라(웃음). 그때는 영화과에 가는 것이 인생을 망치는 거였다.

 

정윤철: 우리 때도 비슷했다. 내가 90학번인데 80년대 후반은 1, 2억 가지고 한국영화를 만들 때였다. 전혀 비전이 없었다.
정성일: 그리고 영화과에 간다고 해서 영화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대학에 간 다음에 영화수업을 너무 듣고 싶어서 모대학교 영화과에 수업을 들으러 갔는데, 어떻게 된 놈의 학교가 맨날 휴강이야(웃음) 그렇게 한 학기를 다니다가 좌절하고 다시는 가나봐라 하면서 그만뒀다.

 

정윤철: 대학 때도 계속 문화원에 다녔을 텐데, 그렇게 영화를 보다가 전환점이라고 할 만한 일이 있었나.
정성일: 대학에서 영화하는 친구들을 만났고, 큰 도움이 됐다.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인 전양준 선배가 1년 과선배였고,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인 한상준 선배도 있었고, 독일 문화원에서는 강한섭 교수를 만났다.

 

정윤철: 당시 독일 문화원파와 프랑스 문화원파가 경쟁을 했다던데.
정성일: 그런 건 아니었다. 궁금하다면 얘기해보겠다. 그때 프랑스 문화원이 활동을 잘하니까 독일 문화원도 지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래서 문화원장이 황당무계한 공약을 내걸었다. 독일 문화원 산하 서클에서 활동을 하고 독일 문화원에서 요구하는 어학시험을 통과하면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속아서 약 400명이 한꺼번에 독일 문화원으로 몰렸다. 하지만 유학은 한명도 못갔다. 80년 5월 독일 문화원 산하 헤겔 연구회와 카프카 학회가 광주와 관련이 있다고 하여 서클이 완전히 끝장났고, 원장은 본국으로 소환당했다. 그 사람이 약간 좌파였던 것이다. 공약을 내걸었던 사람이 갑자기 돌아가니까 공약도 무용해졌다.

 

정윤철: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처럼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었나.
정성일: 전혀 아니었다. 일단 공부를 하고 싶었고,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는 도제 제도가 있어서 연출부를 안 하면 감독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출부 임금이라는 것은 지금보다도 훨씬 열악했다. 집안이 파산을 했기 때문에 나는 소년가장이 되어야만 했다. 정말 충무로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시나리오도 쓰고, 서울극장 기획실장도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집안을 먹여 살려야 했다. 번역도 하고 필명으로 원고도 썼다. 창피해서 차마 필명을 대지는 못하겠는데 여러 잡지에 썼다. 그런데 사람이 가고 싶지 않은 길이 잘 풀릴 때가 있지 않나. 글이 꽤 인기를 얻어서 여기저기서 청탁이 들어왔다.

 

정윤철: 그때는 전문비평이 아니고 영화감상 정도였나.
정성일: 지금처럼 쓰면 거기선 안 받지(웃음). 그러다가 <말>지 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우리가 당신 글을 읽었는데 영화평을 좀 써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정윤철 감독의 대학 시절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도 좋은 세상이 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어서 <말>지에 글을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말>지는 수배자가 아니라면 본명으로 글을 써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수배자는 아니니까(웃음) 그러면 알겠다고 했다. 스물여덟살 때부터 지금까지 쓰고 있다. <말>지 최장수 필자지. 내가 <말>지 편집장 일곱 명과 담당기자 열 두명을 갈아치웠다(웃음). 그 글을 보고 <스크린> 경쟁지를 만든다고 창간된 <로드쇼> 편집장으로 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 이후는 지금 알고 있는 것과 똑같다.

 

정윤철: <로드쇼> 편집장을 맡으면서 우리가 아는, 공식적인 수면으로 드러난 정성일의 인생이 시작됐다. 나도 <로드쇼>를 본 기억이 나고 이 사람은 누군가 궁금해했다. <로드쇼>를 하다가 <키노>를 만들게 된건가.
정성일: <로드쇼>는 92년에 그만두었고, 그해에 <정은임의 영화음악>에 출연하고 <한겨레신문>에 영화평을 썼다. <로드쇼>를 하면서 열패감이 있었다. 하고 싶은 영화저널을 해보겠다는 욕심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30대였다. 그래서 <키노>를 만들게 된거다.

 

정윤철: 모델이 <카이에 뒤 시네마>같은 잡지였나.
정성일: 그렇다. 하나의 롤모델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영화에 대해 생각을 하고, 인터뷰가 가장 중요한 비평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키노>는 모든 감독, 심지어 단편영화 감독도 인터뷰했다. 결국 최선의 비평은 인터뷰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쓴 영화평은 시간이 지나면 쓰레기가 되지만 영화를 만든 감독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영화잡지가 하는 일은 기록하는 거다.

 

정윤철: 그 때문에 임권택 감독과도 그렇게 집요하게 인터뷰를 한 건가. 임권택 감독과 인연을 맺은 건 이장호 감독이 당신을 임권택 감독 책자 필자로 섭외하면서였다고 했는데.
정성일: <씨네21> 598호에 실린 <천년학> 관련 에세이에 이미 썼는데, 내가 임권택 감독을 처음 발견한 건 대학교 1학년때 <족보>를 보면서였다. 그때 황석영을 중심으로 민중문학 논쟁이 벌어지면서 결국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 한국영화란 무엇인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대학에 가기 전에 나는 한국영화를 너무 경멸했다. 시네마테크도 없고 영상자료원도 없고 글도 없던 시절이니까.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나는 한국영화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감독 이름도 모르는채 <족보>를 봤는데, 즉각적으로 이상한 느낌이 왔다. 내가 보아왔던 영화들과 편집 방식이 너무 다른데 굉장히 아름다웠다. 이게 뭘까, 극장 밖으로 나와 감독 이름을 보니 임권택이었다. 그때부터 그 사람 영화를 줄기차게 보기 시작했다. 신기했던 것은 임권택 감독을 더 알기 위해 당시 영화진흥공사에서 자료를 찾아보니 전혀 없더라는 것이었다. 유현목과 김기영, 이만희, 신상옥, 하길종 등은 수많은 자료가 있는데 말이다. 만약 임권택 감독을 알면 한국영화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장호 감독은 마음 속으로 유현목이나 김기영 감독 등을 기대했을텐데 내가 임권택 감독에 관해 쓰겠다고 하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충무로스럽다고 생각했겠지. 대학을 졸업하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젊은 애가 와서 책을 만들 때는 기대하는 게 있었을 텐데 갑자기 상업적인 감독의 이름을 대니 말이다. 그래도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임권택 감독을 <만다라>가 개봉한 86년 11월 둘째주 화요일에 처음 뵙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정윤철: <족보>는 개봉한 영화였나.
정성일: 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개봉관을 못 잡았고 재개봉관에서 개봉한 걸 봤다.

 

정윤철: 그게 언제였나.
정성일: 79년이었다. 그이후 <안개마을> <길소뜸> <티켓> 등을 계속 봤는데, 영화들이 서로 너무 다를 뿐만 아니라, 매번 일취월장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묻고 싶었다.

 

정윤철: <족보> 이후 100번째 영화인 <천년학>까지 왔는데, 그사이에 있던 영화들을 모두 본건가.
정성일: 한편도 빼놓지 않고 모두 봤다. 아시안 게임 기록영화까지 봤으니까. 그 영화는 프린트 자체가 사라졌다.

 

정윤철: 한 거장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아온 것인데, 그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느낌은 무엇이었나.
정성일: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임권택 감독에게 배운 가장 큰 것은 아버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굉장히 오랫동안 아버지와 불화의 시간을 보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너무 냉정했다. 그런데 임권택 감독을 인터뷰하면서 그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인생을 들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그것도 호남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가출을 했고 떠돌면서 20대를 보냈던 사람, 수전증까지 걸려서 내가 정말 살기는 살겠나 이러면서 살았던 사람을 말이다. 임권택 감독은 열여덟에 짐꾼을 했는데, 사지가 너무 아프니까 잠을 자지 못해 밤마다 깡소주를 마시다가 수전증에 걸렸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영화를 만드는 걸 보면 건강한 거지. 어쨌든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삶을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됐다. 그가 왜 그토록 나에게 냉정했고 그런 요구들을 했던 건지에 대해서 말이다. 임권택 감독 연세가 우리 아버지와 딱 한살 차이다. 문득 내 아버지의 삶이 가련하게 느껴졌다. 한국 현대사 속에서 정말 힘겹게 버티어 여기까지 온 모습이. 그러니까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이해하는 과정이 내게는 내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불화의 시간을 극복할 수 있었다. 임권택 감독이 그런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인터뷰를 통해 나는 선물을 얻은 셈이다.

 

정윤철: 어떤 치유의 과정을 겪었겠다. 어찌 보면 임권택 감독은 당신의 아버지가 채워주지 못했던 아버지같은 느낌을 주었던 것이 아닌가.
정성일: 그렇다기보다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 산다는 것에 관한 문제였던 것같다. 꼼짝없이 동시에 체험해야만 했으니까. 1950년대 한국전쟁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가 폐허 속에서 살았고, 해방 이후 좌우대립을 겪었다. 그 이전 일제강점기 또한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도 피해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홀로 버티고 살아갈 수밖에 없던 사람이 가정을 이루었을 때 자식들에게 보여준 모습이라는 것은 그 삶의 결과였을 것이다.

 

정윤철: 이제 영화 이야기로 들어가보겠다. 책을 많이 읽고 공부도 많이 하는 편이지 않은가. 당신의 비평을 보면 저렇게 많은 책과 영화를 어떻게 보나 놀라게 되는데, 비결이 있는 건가. 잠을 자지 않는다던지, 하는 소문도 돌고 있는데. 아, 그리고 <키노> 시절을 잠깐 떠올린다면, 그 몇 년의 세월, 행복했는가.
정성일: 행복하기도 했고 불행하기도 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좋은 동료들과 좋은 책을 만들어서 행복했다. 그때 같이 일했던 기자들은 나중에 편집장이 된 이연호 씨부터 막내에 이르기까지 다들 진심으로 일을 했다. 그것이 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불행했던 건 시자하자마자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려서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는 끝내 해결이 안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화잡지라는 것을 만들면서 그런 문제에 부딪치면 하중이 편집장에게 걸릴 수밖에 없다. 편집장이 일정 정도 책임이 있는 문제기도 하고. 시작하고 딱 1년 동안만 경제적인 문제로부터 자유로웠지 그이후로는 굉장히 힘들었다. 아, 책과 영화를 많이 보는 비결은, 그냥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정윤철: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보려고 노력하는 편인가.
정성일: 원칙이 하나 있다. 내가 군대에서 맹세한 건데,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 페이지 이상은 반드시 읽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하고의 약속이다. 두 번째 약속은 아무리 짧은 문장이라도 하루에 한 가지 이상 글을 쓴다는 것이다. 때로는 단상일 수도 있고 때로는 긴 글일 수도 있다. 세 번째는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세편이상 영화를 본다는 것이다. 집에서 DVD를 보든 시네마테크에 가든. 그것이 내가 스물 두살 이후 지키고 있는 나와의 약속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시네필이어서 영화만 계속 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다 보면 사람이 바보가 된다.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말이다. 반면 글을 안 쓰고 책만 계속 읽는 사람은 머리가 잡다해지는 것같다. 나는 영화를 보는 것과 책을 읽는 것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글을 쓴다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중재하는 것, 내가 표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정윤철: <키노>가 창간되던 시기는 냉전이 끝나고 포스트모던적인 사조가 밀려들 무렵이었다. 영화에 있어서도 우리가 시도하지 않았던 사조와 담론들이 소개됐다. 독자에겐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키노>는 그런 것들을 소개하는 거의 유일한 잡지였다. 나도 <키노>를 많이 샀는데, 당시만 해도 낯설었던 이름들인 보드리야르, 들뢰즈, 푸코 등을 인용하곤 했다. <키노>는 어떻게 보면 최초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후기 구조주의 철학 이론 등을 끌어들여 영화를 연구했다. 어떻게 해서 그런 방법을 택하게 됐나.
정성일: 책을 읽다보면 한 권의 책이 다른 책을 소개하게 된다. 우리는 최신 철학을 소개해야해,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동시대적인 사고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있었다. 왜냐하면 <키노>는 혹은 나는 지금 현재에 살고 있는 거지 과거에 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고전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사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그 배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한다.. 내가 명석하다면 그 답을 혼자 생각했겠지만 그 정도 지혜는 가지고 있지 못하니 자꾸 다른 사람 견해를 구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동시대의 철학자와 미학자, 소설가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서로 접속을 하는 거다. 정윤철 감독도 고전영화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동시대를 사고하기 위해 현대영화도 보고 동시대 철학책도 읽지 않나. 그렇게 하는 까닭은 이 시대에 살아가기 위한 ‘좌표’를 얻기 위함이다. 칸트와 헤겔과 스피노자는 위대하다. 그러나 그들을 읽으면서 2007년 남한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좌표를 얻기란 쉽지 않다.

 

정윤철: <키노>가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키노>에서만 다루는 현대 철학과 다른 이론들이 어렵고 낯설었던 까닭도 있겠지만, 이 잡지는 왜 이런데 관심이 있을까 궁금해서이기도 했다. 불어도 많이 쓰고 소제목 이름도 어렵고(웃음). 죄우간 아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하면서 호기심도 생기는, 뭐랄까 어떤 이국적인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연관을 찾을 수 있지만 당시엔 지식이 없었으니까.
정성일: 효율적으로 전달하지 못한 탓도 있다. 효율적으로 전달을 하고, 전략을 세워서 배치도 잘 했어야 했는데, 그런 점에선 미숙했다.

 

정윤철: 당신은 그때부터 색이 확실했고 지금도 호불호가 명확하다. <키노>에서 그런 가치관이 확립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정성일: 나는 어릴 적부터 그랬다. 영화를 본다는 행위에는 직관이 포함되어 있고, 논리적으로 따지는건 사기라고 생각한다. 직관적으로 이 영화가 좋다 싫다라고 몸이 반응을 한다. 당신도 직관이 오지 않나. 그런 직관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세계관과 경험과 세상에 대한 태도의 총체적인 반응이다. 그대신 나는 나이를 먹어가며 이런 걸 묻게 됐다. 나는 이 영화가 싫다, 그러면 왜 싫은가. 그런 것에 대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았다. 비평가로서 어떤 영화에 대해 가지는 자신의 태도는 중요한 것이다.

 

정윤철: 어쨌든 자기 색이 뚜렷했다.
정성일: 새로 기자를 뽑을 때 난 먼저 <키노>는 편견이 있는 잡지라고 말했다. 우리는 균형 잡힌 사고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싫다면 다른 잡지를 선택해라,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좋아할 거고 우리가 싫어하는 영화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겠다고. 만약 영화잡지가 <키노> 뿐이었다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당시 <씨네21>을 비롯한 너무나 많은 영화잡지들이 생겼고, 얼마 뒤엔 인터넷도 보급됐다. 여러 가지 정보들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때 한 잡지가 소위 균형 잡힌 생각을 한다는 건 이 시장을 다 책임지겠다는 건데, 그건 오만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정책은 무엇인가, 그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겠는가. <키노>에 서운해 하는 감독들도 있다. 나에겐 관심이 없다, 어떤 감독을 과도하게 다루는 거 아니냐, 라는 거지. 그런데 키노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명단이 중요하다고.

 

정윤철: <키노> 마지막 호에 이런 내용의 글을 썼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렵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가들에 관한 글을 쓰며 어찌 어렵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런 글들을 쓸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하지만 영화가 어렵고 위대하다고 하여 그걸 해석하는 글조차 어려울 필요가 있는지.
정성일: 거기에 관해선 항상 인용하는 아도르노를 인용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지식을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지식을 간단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점점 사고를 마비시키고 논리 자체를 무시한다. 결정적으로 말하자면 철학은 점점 광고 카피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내 글을 읽는 것은 사유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나는 아도르노처럼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그 태도는 배우고 싶다.

 

정윤철: 일부러 쉽지 않게 글을 쓴다는 뜻인가.
정성일: 쉽지 않다는 것은 고마운 표현이고, 나는 내 글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을 만들어내고 싶다. 나는 별점을 굉장히 경멸한다. 그 별점은 영화가 아니라 그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어떤 영화에 별 두개를 매기는 순간, 그가 영화를 보는 수준도 별 두개가 된다는 뜻이다. 지금 영화는 너무 쉽게 소비되고 있는데, 나는 영화를 잠시 멈추어 세우고, 영화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럴 때에만 비로소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해석의 공간, 창조의 시간에 대한 성찰, 세상에 대한 반성 등을 획득할 수 있다. 내가 그 영화를 봤지, 하고 만다면 누가 영화를 향해 배움을 구할 수 있느냐는 거다. 정윤철 감독도 누군가 당신의 영화를 보고 나서 스무자로 쓰고 별점 주면 화나지 않나. 그 영화를 싫어해도 길게 쓰는 게 좋지.

 

정윤철: 그렇다고 해도 영화에 관한 글을 쓰면서 소통을 염두에 둘 텐데, 어느 선을 지킬 것인지 고민되겠다.
정성일: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내 글의 독자는 단 한사람,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내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사실 관심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감독의 이름으로 비유되는 영화의 주인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정윤철이라는 이름에는 그 영화의 모든 관련자들이 압축되어 있지 않나. 그러므로 내가 감독을 호명할 때 그것은 감독 개인이 아니라 그 영화에 참여한 모두, 어떤 총체성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 모든 것을 조율하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물론 감독 개인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더더욱 쉽게 써야하지 않나? 감독들 생각보다 무식하다...라는 말을 나는 차마 못한다.

 

정윤철: 하지만 글을 쓰면서 대중에게 무언가 설명해주고, 하다못해 계몽을 한다는, 그런 욕망은 있지 않나.
정성일: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전력투구한다. 당신과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알게 되긴 했지만, <좋지 아니한가>를 봤는데 이해가 안 되는 거다. 이 영화가 도대체 왜 이래야 하는 건지. 천호진과 정유미를 보면서 둘 중 하나다 싶었다. 그 이야기에 뭔가 하나가 더 있어야 했거나, 섹스를 하고 새 족을 꾸며서 나감으로써 심씨 가족이 돈 버는 기계인 아버지 없이 견딜 수 있느냐고 물어보거나. 그런데 <좋지아니한가>는 어느 쪽으로도 결정을 안 했다. 전자라면 이 영화는 뭔가 결핍된 거고, 후자라면 이 영화는 결단을 하지 못한 거다. 이런 불균질성이 발생했을 때 나는 질문을 던져보고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생각하여 글을 쓰는 거다. 그 질문을 견디지 못한다면 그 영화는 부서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질문을 통해 내가 세상에 대한 배움과 깨달음을 얻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 영화를 지지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정윤철: 글을 쓰고 논리적으로 생각을 하여 결론까지 간다는 건데, 결론이 나지 않을 수도 있는 건가.
정성일: 내가 항상 답을 구하지는 못하니까. 때로는 그 감독의 다음 영화에서 답을 얻기도 한다.

 

정윤철: 그렇다면 질문을 던지는 대상이 단 한명의 독자인 감독인가. 영화는 무생물이니까 말이다.
정성일: 예를 들면 <피와 뼈>의 감독 개인에게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감독의 이름으로 비유되는 영화의 주인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정윤철이라는 이름에는 그 영화의 모든 관련자들이 압축되어 있지 않나. 그러므로 내가 감독을 호명할 때 그것은 감독 개인이 아니라 그 영화에 참여한 모두, 어떤 총체성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 모든 것을 조율하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물론 감독 개인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그런 면에서 이야기를 이어보자면 어떤 영화를 보아야하는가라는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예전에 당신이 <TTL>에 썼던 글을 읽었다. 주인같은 노예가 있다,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한 그 노예는 언제까지나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런 논의로 내용을 이어나가며 진짜 영화와 가짜 영화를 언급했다. 좀 더 설명을 해줄 수 있는가.
정성일: 이렇게 대답을 하겠다. 대중으로서 영화를 보는 단계를 지나 내가 자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를 보는 여러 가지 태도가 생겨난다. 예를 들면 스피노자적인 태도와 플라톤적인 태도가 있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니체적인 영화보기가 가능하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니체가 세상을 대하듯 말이다. 영화라는 것은 세상을, 잠재적인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영화라는 것은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액추얼한 세계로 놓고, 가능한 세계를 찍는다. 이 가능한 세계에 대해 내 자의식으로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내가 이 화두를 던진 이유는 많은 비평가와 진지한 이들이 영화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 데카르트적으로 사고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고. 나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영화를 볼 때 니체적인 영화보기를 통해서 자기가 영화를 보는 행위에 의문을 던져보고, 그 영화에 붙들린 노예의식이라는 것으로부터 뛰쳐나오고, 거기에 대해 비판하고 주체를 되찾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 싶다. 그럴때 비로소 니체가 말하는 진짜와 가짜가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가짜는 부정적인 의미의 가짜는 아니고, 가능성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정윤철: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사유를 하고, 괴로움을 참으면서까지 영화를 보는 이는, 일반 대중이라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굳이 나눈다면, 영화는 대중영화와 예술영화로 나눌 수도 있겠는데,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해본다. 대중음악은 대중음악 평론가가 있고 클래식은 클래식 평론가가 있고 재즈는 재즈평론가 있는데, 영화는 한명이 그 넓은 스펙트럼을 뭉뚱그려 매체에 글을 쓰지 않나. 그런데서 부담감이 오지는 않나.
정성일: 그것은 생각의 차이일 수 있을 거다. 나는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구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영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어떻게 영화를 붙들 것인가, 어떻게 영화를 이해할 것인가, 납득하고 싸울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건 대중영화니까 이건 예술영화니까 이렇게 보지는 않는다. 관객의 숫자와 관계없이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괴물>은 예술영화다. 내러티브 구조와 영화의 형식을 비롯한 여러가지 점에서 그 영화는 아트필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나는 영화에 대해 생각할 때 대중영화와 예술영화를 구별하는 것이 매우 무의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당신도 <말아톤>은 대중영화로 찍고 <좋지아니한가>는 예술영화로 찍고, 그렇게 하지는 않지 않았나.

 

정윤철: 이 자리에 오기 전에 감독과 배우 몇 명에게 질문을 받았다. 이건 김혜수가 물어온 질문이다. 영화평을 보면 좋고 나쁨을 떠나 이 사람은 이런 영화를 좋아하고, 저 사람은 저런 영화를 좋아한다고, 안 봐도 알 수가 있다. 말하자면 장르화 되어 있어서 평을 읽기도 전에 결과를 예상할 수 있고, 그 때문에 잘 안 읽게 된다는 거다. 한국의 영화평론가들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고 보나.
정성일: 똑같이 반문하고 싶다. 홍상수 감독에게 <친절한 금자씨>를 만들라고 요구하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박찬욱 감독에게 다음 영화는 <해변의 여인>과 비슷하게 찍으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비평가들도 자기 세계관이 있고 취향이 있고 지금까지 읽어온 책과 보아온 영화가 있고 경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 <극장전>도 좋아하고 <태극기 휘날리며>도 좋아하면 그 사람 되게 이상한 비평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당신의 애티튜드는 무엇이냐고 묻고 싶은 거다. 나는 한쪽을 지지하는 비평가에 대해선 반감이 없다. 가끔 보면 모든 영화에 별 네 개나 세 개를 주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취향을 가진 비평가인가. 나는 그럴 때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 글은 읽지 않아도 알아, 그 사람이 누구 좋아하는지 알고 있지, 이것이 매너리즘에 빠지면 문제가 되겠지만 취향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의 취향 자체를 알 수 없을 만큼 공정함을 내세우는 것은 더욱 의심스럽지 않은가.

 

정윤철: 하지만 영화가 만들어질 때 의도가 다르다면 어떤가.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처음부터 목표 지점이 다른 영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카테고리를 지어주면서 비평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이 영화의 목표지점은 이 정도, 그러니까 음악으로 치자면 대중가요 정도다. 음악에는 댄스그룹의 노래도 있고 싱어송라이터가 부른 그럭저럭 잘 만든 대중음악도 있고 나아가면 클래식이나 이런 예술적인 음악도 있다. 영화도 이런 각자의 틀 안에서 완성도를 평가받는 건 불가능할까.
정성일: 이렇게 대답을 하겠다. 나는 정윤철 감독의 단편 <기념촬영>을 지금도 좋아한다. 아주 좋아하고, 굉장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기념촬영>은 무언가 간절하게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수많은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을 건너 뛰어와서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 다음에 <말아톤>을 봤을 때 나는 그 영화를 대중영화나 상업영화의 카테고리로 보지는 않았다. 나는 이 영화가 무슨 질문을 하고 싶은지를 보았다. 무슨 질문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더라.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말아톤>은 자폐증 소년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가족의 문제를 우회해서 다루고 있다. 문제는 이야기하려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장치들, 이야기들, 마지막 클라이맥스로 몰아가기 위해 수없이 덧붙여진 것들이 <말아톤>을 둔하게 만들었다. 나는 질문하고 싶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뻔한데 왜 에둘러갔는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말아톤>을 보고 나서 어떤 글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기념촬영>을 찍었던 감독이니까. 이 연출자가 두번째 장편으로 <좋지 아니한가>를 찍었기 때문에 나는 기대를 하게 된 거다. 물론 나도 제도권 영화의 현장에서 한 사람의 연출자가 데뷔하기 위해 감수하는 여러 가지 타협의 순간들과 열악한 환경을 알고 있다. 그런 것들을 다 괄호칠 만큼 비평가가 세상의 현실에 둔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말아톤>을 둔하게 만드는 것들을 보며 저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묻게 됐다. 그 질문은 비평가에게 매우 중요하다. 나는 이 영화의 퀄리티나 완성도 같은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내 질문은 이 영화의 애티튜드는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웰메이드라는 단어를 경멸한다. 그것은 영화를 제작자나 프로듀서의 것으로, 말하자면 상품으로 보는 것이고, 어떤 창조의 영역도 발견하지 못한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무엇을 창조하는가, 무엇을 비판하는가, 그리고 그사이에서 어떻게 중재하는가를 보고 싶은 거지, 잘 만든 이야기를 보고 싶은 건 아니다.

 

정윤철: 내가 한국의 영화평들을 읽으며 가장 아쉬웠던 것은 내러티브(이야기) 위주의 분석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한국평론가들은 줄거리와 이야기에 집착을 하고 이야기가 잘 짜여져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도 결국 이야기 아닌가. 그것도 영화에서 핵심이겠지만, 영화가 왜 영화인가 하는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한다. 컷이 있고 사운드가 있고 예술로서 영화가 있는데, 평론은 내러티브와 인물과 구성 위주로만 풀어간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에 <필름아트> 저자인 데이빗보드웰이 한국에 와서 그의 강의를 들으러 갔다. 미국의 교수가 홍상수와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샷 바이 샷으로 분석하며 허우샤오시엔과 비교하는 것을 보며 놀랐다. 미장센과 영화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을 하는 걸 보고 대단하구나 싶었다. 한국영화계에는 그처럼 미학적인 스타일이나 영화 자체를 분석하는 평론이 왜 이렇게 없는 것인가.
정성일: 내가 모든 비평을 읽지는 못하므로 개인적인 소견이라는 것을 전제로 말하겠다. 나는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숏과 씬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숏과 씬은 결국은 다 떨어져나가는 단위들이라는 거다. 그러므로 숏을 씬으로 연결하는 논리가 필요한데, 이 논리가 이야기다. 영화비평이 이야기를 물어본다면, 그 질문은 정확하게 이야기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의 논리가 무엇인지 묻는 거다. 숏이 어떤 방식으로 붙어있는가, 붙어있는 이야기를 연출자가 어떻게 쪼개고 있는가, 이 이야기는 왜 쪼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장면을 투숏으로 찍었는가 혹은 숏 리버스 숏으로 찍었는가, 하는 것들을 묻는 거다. 나는 한국의 영화감독들에게 묻고 싶다. 한국영화가 점점 깊이가 없어지는 까닭은 젊은 감독들이 리액션 숏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리액션 숏에 대한 철학이 없고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끊어서 상대를 보여줄때, 이것은 결단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숏은 어차피 찍어야 하는데, 리액션 숏을 찍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 논리를 질문하고 싶다. 그러므로 당신 질문과 똑같은 답이 되는 셈이다. 나는 영화에 대한 질문을 문학 텍스트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산문화하고 줄거리로 환원하고 그 줄거리를 묻는다면, 이것은 줄거리 요약에 불과하다.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를 따져 물어야 할 때가 있다. 이야기에서는 필연적으로 나와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안 찍은 거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가 그렇다. 왜 건너뛰어도 된다고 생각합니까, 왜 그 씬이 없습니까. 그의 영화는 이야기로 환원하지 않으면 질문을 할 수가 없다. 임권택은 장면을 건너뛰며 찍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고다르가 점프컷의 고수라면 임감독님은 점프씬의 대가랄까? 좌우간 <취화선>, <하류인생>에서 끝장을 보여줬지. 많은 관객들이 이야기가 툭툭 끊겨 당황했지만 그런 편집이 개인적으론 씨원 씨원했구 뭔가 미래적인 영화의 느낌이었다.

 

정윤철: 어쨌든 이야기를 제일 중요시하면서 말이 된다 안 된다 식의 평이 많은 건 사실이다. 스토리텔링 위주의 비평이 관객에게는 쉽게 읽힐 수는 있겠지만 감독이나 영화인들에게는 자극이 되지가 않는 것같다. 편집과 연출과 사운드와 연기 같은 여러 중요한 요소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왜들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정성일: 나의 동료들을 위해 반문하자면, 스토리텔링을 중요하게 보지 않아도 되는 영화들을 찍어줬으면 좋겠다. 허우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는 스토리텔링으로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다. 차이밍량의 <나는 혼자 잠들고 싶지 않아>,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 지아 장커의 <스틸 라이프>,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줄거리를 써봐야 이야기 자체가 뭔지 모르는 영화들이다(웃음). 나는 그런 비평이 범람하는 것을 뒤집어 보면 그만큼 한국영화가 스토리텔링에 매여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많은 감독이 스토리텔링에 매여 있고, 당신이 말했던 모든 요소들이 스토리텔링에 봉사하고 있지 않나. 한국영화비평의 약점은 한국영화의 약점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의 영화비평은 한국영화와 상관없이 쓰여지는 게 아니라 조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들이 영화비평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편함이 아닌 부족함이라고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은 고스란히 한국영화의 부족함으로 돌아온다.

 

정윤철: 그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일수도 있겠다. 스토리텔링 위주의 비평을 하다보니까 감독들이 스토리를 중요시여기고 결국 시나리오도 자기가 쓰려고 하는 것 아닐까?
정성일: 원인과 결과가 바뀔 수는 없다. 영화가 나와야 비평이 나오는 거지, 이런 비평을 받고 싶다고 만드는 영화는 없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따져 묻는 사람은 없다. 김기덕과 박찬욱도 마찬가지다. 비평가들은 영화에 조응하는 비평을 쓴다. 감독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내가 스토리텔링의 감독은 아니었는지, 내 영화의 많은 요소가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것은 아닌지.

 

영화를 왜 영화 자체로 못 보는가.. 나와 동료 감독들은 늘 말하곤 한다.

 

정윤철: 좋다. 당신은 한국영화의 약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건데, 감독도 노력해야 하는 문제다. 그런데 그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보고, 정치적인 함의를 파악하고, 정신분석하듯 영화를 분석하는 것들도 중요하지만, 비평이 미학적인 관심도 가졌으면 좋겠다. 영화를 잘 찍었다고 말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무슨 개념으로 리액션 숏을 이렇게 붙인 건가, 클로즈업이 왜 들어가는가, 이 스타일이 주제에 맞게 쓰였는가... 이렇게 영화를, 미학을 지닌 텍스트 자체로 보고 형식 자체에 대한 비평을 한다면 감독들도 좀 더 긴장을 하게 될 거다. 영화를 분석하며 언제나 철학이나 정신분석이나 여러 가지 다른 학문을 끌고 들어와서 분석하는 경향이 많다는 건 영화미학을 너무 폄하하는 것 아닌가?
정성일: 전혀 다른 문제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영화가 다른 예술에 비해 세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베토멘의 현악사중주를 분석하면서 창작 과정을 분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땐 악보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현악사중주에서 도와 미 사이에 이데올로기는 없다. 레와 솔 사이에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차이가 있는지 묻는다면 답은 끝내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좋지 아니한가>의 가족은 등장하는 바로 그 순간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중산층인가라고. 혹은 <가족의 탄생>을 보면 왜 김태용 감독은 가난한, 거의 부서져가는 가족을 다루는가를 묻게 된다. 말하자면 영화는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너무 세상 안으로 들어와 있다. 레와 솔을 물어보듯, 도와 미를 물어보듯, 미학적인 방향으로 완전히 철수할 때, 영화는 굉장히 빈곤해지고 앙상해진다. 그 영화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세상을 향해 던지고 있는 (영화 속의) 수많은 질문과 기호와 모순과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한 편의 영화를 끌어안기 위해 세상의 지식을 함께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왜? 세상을 찍고 있으니까. 나는 정신분석학이건, 사회학이나 경제학이나 정치학이건, 분과별로 보기보다는 세상의 지식으로 보고 싶다. 지식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니까. 그러므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세상의 지식이 필요하다.

 

정윤철: 많은 영화인과 감독, 심지어 관객마저도 평론에 불만을 제기하며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영화를 영화 자체로 생각해야지,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 그것으로 영화 전체를 평한다는 거다. 나도 그런 경향이 너무 많지 않나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그런 식으로 비평을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아니면 좋을 텐데.
정성일: 똑같이 반문하겠다. 그 질문 자체가 영화를 폄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영화는 그냥 구경거리가 아니다. 예를 들면 정윤철이 시나리오를 쓸 때,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쓰는 순간 세상은 이미 시나리오에 끌려온다. 이 인물은 합당한가, 나는 2007년에 왜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나, 이 이야기가 세상과 어떤 호흡을 이루는가, 가족이라는 토픽을 던질 때 내 화두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에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가능(한)세계라고 생각한다. 그 가능한 세계라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현실적 세계에 닿아 있다. 감독들은 홍상수가 가능한 세계 1을, 정윤철이 2를, 김기덕이 3을, 임권택이 4를 만든다. 즉, 이런 식으로 이 세상을 둘러싼 여러 (가능한) 세계를 영화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를 통해 우리는 현실적 세계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된다. 영화는 그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우리에겐 무엇이 문제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럼 현실세계에 살고 있는 비평가들이 가능세계를 만든 영화를 보고 현실세상의 변화 의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영화를 영화로만 봐달라고 한다면 가능세계는 현실세계로부터 떨어져나와 불가능 세계가 된다. 우리가 헐리웃 영화를 보며 후진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런 거다. 영화를 영화로 봐라, 그렇다면 <300>을 보면 되는 거다. <300>이 영화의 참맛인가.

 

정윤철: 무엇이 좋은 영화이고 나쁜 영화라고 여기는가?
정성일: 나는 이런 말을 인용하고 싶다. 차이밍량이 서울에 왔을 때 누군가 질문했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의 차이는 무엇인지. 차이밍량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나쁜 영화는 지구의 종말을 걱정하는 영화고 좋은 영화는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다. 나는 거기에 진리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정윤철: 그렇지만 내 문제만이 아닌 어떤 거대한 것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정성일: 그럼 파시즘이 되는 거지.

 

정윤철: 환경문제나 남의 문제들을 걱정하는 영화가 나쁘단 말인가?
정성일: 나는 그때 영화가 프로파간다가 된다고 생각한다. 진보적 프로파간다도 있고 보수적인 프로파간다도 있지만 비슷하다. 나는 똑같은 사건(미국 컬럼바인 고교의 총기 난사사건)을 다룬 영화라고 해도 <엘레판트>는 지지하지만 <볼링 포 컬럼바인>은 지지하기가 힘들다. <볼링 포 컬럼바인>은 폭력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는 반문하고 싶다. 이해해도 괜찮은 건가. 폭력이 이해되는 순간 그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말 부조리하다는 질문을 던지고, 가능해서는 안 되는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영화의 미학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봐달라고 했는데, 우리는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면 이런 표현을 쓰지 않나. 숭고하다고.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숭고한 가치가 아닌가 싶다. 나에게는 미학에 사로잡히는 것이 타락의 징후로 보인다. 눈을 움직이는 건 미학이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건 숭고함이다.

 

어떤 이에게 영화란 종교적인 무엇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정윤철: 영화가 재미있고 분석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영화만이 갖고 있는 상호텍스트성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야기에 세상이 담겨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 이데올로기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게 읽혀지지 않는 영화를 보면 어떻던가?
정성일: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아무런 정치적 메시지도 담고 있지 않다. 거대담론도 없고, 평범한 이야기일 뿐이다, 딸을 시집 보내는 게 전부인데도 그 영화는 진행이 너무 기괴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오차즈케의 맛>을 보면서 망연자실했다. 그 영화는 오즈의 다른 영화들처럼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영화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타이틀이 올라올 줄 알았다. 남편은 여행을 떠나러 공항에 갔고 아내는 문제가 해결이 됐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오즈의 영화에 언제나 나오는 방식으로 텅 빈 방들이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밤중에 귀신처럼 남편이 돌아온 거다. 이 사람이 미쳤나, 여기서 더 이상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생각하는데, 남편이 비행기가 고장 나서 떠나지 못했다고 말하는 거다.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게. 그러다가 밥을 좀 먹자고 그런다. 그 집은 언제나 식모가 밥을 했는데 한밤중이니까 집에 간 거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아내가 남편을 위해 밥을 한다. 오차즈케를. 오차즈케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다. 남편은 자수성가를 했지만, 아내는 부유한 사람이어서 오차즈케를 촌스럽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반찬이 오차즈케 뿐이었다. 부부가 저녁 식탁에 앉았는데, 이건 절대 나누지 못할 거야, 나누는 순간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니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즈는 그 장면을 나누었다. 그 순간 오즈는 왜 그 장면을 쪼갰는가. 그는 감독으로서 결단하듯 내리친 거였다. 쪼개는 순간 이 구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참을 생각하다 집에 가는 길에 문득 그 결단의 위대함이 느껴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그 장면은 고정된 카메라로 롱테이크를 찍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찍어서 두 사람의 감정을 자르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오즈가 그걸 자르고 진행한 것은, 투샷으로 찍어서 시간이 진행되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다. 관객은 그 장면을 이미 투샷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음 장면에서 남편은 친구를 만나 여행갔다 온 이야기를 한다. 전날 밤 남편이 돌아온 것이 아내의 꿈이었는지, 남편이 진짜 집에서 밥을 먹고 여행을 떠난 건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순간은 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 중의 하나다. 숏을 쪼개는가 마는가, 진행을 하는가 마는가, 마음을 나눌 것인가 이을 것인가의 결단. 오즈는 나에게 이 배움을 줬다. 영화는 세상이지만 쇼트는 그자체로 우주다. 그래서 쇼트는 항상 영화보다 크다는 생각을 한다. 왜? 영화는 세상을 쫓지만 쇼트는 잡는 순간 완결된 우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쇼트를 쪼개는 건 우주를 자를 것인가 말것인가를 질문하는 거다. 그것은 브레송에게도 르누아르에게도 히치콕에게도 당연히 묻게 되는 질문이다.

 

정윤철: 그런 상호텍스트성이나 함의가 없더라도 영화 자체가 신선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 영화의 형식 자체가 사유를 하게 만들고 새로움을 느끼게 해준다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 않은가.
정성일: 이건 개인적인 느낌인데 나는 켄 로치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한 번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그냥 정치를 다룬다. 나는 영화가 정치를 다룰 때 촌스러워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를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 때는 행복하다. 정치적인 영화는 힘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오즈가 <오차즈케의 맛>의 마지막 장면을 찍었을 때, 그것은 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롱테이크로 찍었을 두 부부의 식사 장면을 샷을 나눠서 한 명씩 잡았음) 전후 일본사회에서는 오즈에게 있어 숏을 쪼개는 그 결단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다. 전후 일본이 패전을 딛고 경제성장을 향해 나아갈 때 가족이 어떻게 쪼개지느냐, 개인화, 파편화 하느냐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다루진 않지만 샷을 쪼개는 것 그 자체가 오즈를 정치적으로 만든다.

 

정윤철: 영화가 정치를 다룰 때와 영화를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은 다르다는 말인가.
정성일: 나는 후자를 지지하고 싶고, 후자가 항상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강의를 하면서도 학생들에게 영화를 진행하며 해서는 안되는 결정적인 일이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함부로 죽이는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영화는 쓰레기야, 네가 창조한 인물이라고 해서 함부로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면 너는 파산한 거야, 그런다. 그것이 아무리 미학적인 것이더라도. 나는 미학적인 결정보다 상위에 있는 결정은 윤리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윤리라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것은 도덕과는 다르다. 나는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면 미학은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미학은 별로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학에 매달릴수록 영화는 빈곤해지고 퇴폐적이 될뿐만 아니라 몰락한다. 미학의 절정에 도달한 순간 모든 예술은 타락을 경험했지 않았나.

 사진 : 손홍주 (사진부 팀장)   
글 일일편집장 정윤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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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때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된 영화평론가 정성일씨.

중학교 1학년때 그 탈바가지 미술 과제가 없었다면,

미술숙제하느라 새벽까지 고뇌하지 않았다면,

내인생에서 정은임과 정성일을 더늦게 혹은

못만났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보는 나 



Posted by 판타스틱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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